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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체서용론(中體西用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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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체서용론은 양무운동(洋務運動)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한 대표적 학설인데, 이러한 사상적 맹아는 풍계분(馮桂芬)의 『교빈로항의』, 정관응(鄭觀應)의 『성세위언』, 왕도(王韜)의 『도원척독』, 이서분(李瑞 )의 「주청광추학교습(奏請廣推學校 )」 등에서 볼 수 있다. 청일전쟁(淸日戰爭) 후 서서히 빛을 잃어가자 장지동(張之洞)은 『권학편(勸學篇)』에서 본격적으로 이를 주장하였다. 그는 무술변법(戊戌變法)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에서 중학(中學)을 체, 서학(西學)을 용으로 하는 중체서용론을 명확히 내세워 자기 문화의 자존의식에서 출발하여 서구 문화 수용의 방법을 국민에게 제시하였다. 그는 \"중학은 내학(內學)이고, 서학은 외학(外學)이며, 중학은 몸과 마음을 단련하고, 서학은 세사(世事)에 대응한다\"라고 하여, 민족적 전통 문화·민족 정신의 기초 위에서 서구의 신지식(新知識)을 습득한 새로운 지식인·관료를 양성하려고 하였다. 중체서용론은 중국의 전통적인 정치·제도·도덕·학문 등의 정신 문화적인 것은 본체로서 변혁할 수 없는 것이며, 물질·기술적인 것은 보다 나은 것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렇게 그는 체와 용을 분리함으로써 서구의 과학·기술·기계 등의 도입의 길을 열어 중국의 부국강병을 꾀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개량주의적인 주장은 체용(體用)의 분리를 인정하지 않고 서구 문물의 도입을 배제하려고 한 보수파와 대립함과 동시에 도입의 범위를 서구의 정치·제도·문화에까지 확대시킴으로써 중국의 근대화를 꾀한 변법파(變法派)와도 대립되었다. 우리 나라의 경우 개신유학(改新儒學)적 학풍을 배경으로 하여 전통적 교육과 신교육을 함께 받은 남궁억(南宮檍)·김택영(金澤榮)·박은식(朴殷植)·장지연(張志淵) 등이 이러한 사상적 경향에서 자강운동(自强運動)을 전개하였는데, 이들은 한국 근대 정신사에 자주성 지향이라는 하나의 조류를 형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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