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李栽): 1657~1730. 자는 유재(幼材), 호는 밀암(密菴), 본관은 재령(載寧), 현일(玄逸)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작은아버지 휘일(徽逸)과 숭일(嵩逸)에게 수학하였다. 생전에 부친을 지극 정성으로 모시면서 학문을 연구하였으며, 누차 조정에 천거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만년에 임하(臨河) 금소(琴韶)에 묻혀 독서궁리(讀書窮理)로 후진양성에 힘써 많은 문인을 배출하였다. 저서로는 『홍범연의(洪範衍義)』·『성유록(聖喩錄)』·『금수기문(錦水記聞)』·『주서강록간보(朱書講錄刊補)』·『안증전서(顔曾全書)』·『주어요략(朱語要略)』·『밀암집(密庵集)』이 있다.
이상정(李象靖): 1711~1781. 자가 경문(景文)이고, 호는 대산(大山), 본관은 한산(韓山),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태화(泰和)의 아들이며, 외조부 이재(李栽)의 문인이다. 1735년(영조 11) 증광시(增廣試)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가주서(假注書)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였고, 1739년(영조 15) 연원찰방(連原察訪)이 되었다가 이듬해 사직하고 고향의 대석산(大夕山) 기슭에 대산서당(大山書堂)을 짓고 학문과 후진양성에 힘썼다. 1753년(영조 29) 연일현감(延日縣監)이 되었다가 사직하려 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가 고신(告身)을 박탈당하였다. 그 후 다시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의 학문은 이황(李滉)의 학통을 계승하여 성리학 연구에 깊었다. 고종 때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뒤에 고산서원(高山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대산집(大山集)』이 있다.
이광정(李光靖): 1714∼1789. 자는 휴문(休文), 호는 소산(小山).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상정(象靖)의 아우이며, 종숙(從叔) 지화(志和)에게 출계하였으며, 이재(李栽)의 문인이다. 과거에 불운하여 은거하여 후진양성에 힘썼다. 만년에 학행으로 천거되어 참봉·동몽교관·사과·승의랑 사포서별제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저서로는 『소산집(小山集)』이 있다.
이우(李㙖): 1739~1810. 자는 치춘(稚春), 호는 면암(俛庵), 본관은 한산(韓山), 광정(光靖)의 아들이다. 과거에 불운하여 마을 부로들의 추천으로 귀담서당(龜潭書堂)을 맡아 생도를 가르쳤다. 1792년에 올린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신원을 청하는 영남유림만인소에 소수로 추대되어 대궐로 나아가 의릉참봉에 제수되었다. 이후 어린 순조가 즉위하자 시세가 크게 달라져 1805년 소두(疏頭)를 먼 섬에 귀양 보내야 한다는 대신과 대간의 연달은 논계에 의하여 이듬해 고금도로 유배되었다. 우윤(右尹) 최헌중(崔獻重)의 상소로 4월에 귀양이 풀려 돌아왔다. 저서로는 『면암집(俛庵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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