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넷
유교넷
유교넷 통합검색
검색 한자입력| 검색코너| 로그인| 마이페이지| 사이트맵| 도움말

문중관

Home > 참여광장 > 자유광장 > 문중관
문중관
유교소식
자유게시판
오류신고게시판
맛집추천
숙제도우미
FAQ
안동김씨 소산종회 (安東金氏 素山宗會) 오류신고게시판
대표자(주손)
김기년  
종택 및 주요건물
건 물 명 : 청원루(淸遠樓) 
소 재 지 :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소산 1리 87 
건립연도 : 1520년대 
기타사항 :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99호(1985.10.15.) 
문중 홈페이지
내용없음
주요인물
김번(金璠): 1479~1544. 자는 문서(文瑞),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삼귀정을 지은 사헌부장령 김영수(金永銖)의 아들이다. 1513년(중종 8)에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평양서윤으로 재임하였으며, 군자감직장을 거쳐 성균관전적·예조좌랑·병조좌랑·경기도사·헌납·이조정랑·병조정랑·예조정랑·제용감첨정·평양서윤·시강원문학 등을 역임하였다. 평양서윤이였을때 둔전책(屯田策)을 건의하고 권농에 힘썼다. 증손 선원(仙源) 김상용이 영의정을 지냈고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하였으므로 이조판서(吏曹判書) 및 대제학(大提學)에 추증(追贈)되었다.

김상헌(金尙憲): 1570~1652. 자는 숙도(叔度), 호는 청음(淸陰)·석실산인(石室山人)·서간노인(西磵老人)이다. 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 김극효(金克孝)의 아들이다. 1596년(선조 29)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正言)·교리(校理)·직제학(直提學) 등을 역임하였으나,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金悌男)이 죽임을 당할 때 혼인 관계로 인해 한때 파직되었다. 서인(西人)으로 인조반정(仁祖反正)에 가담하지 않은 청서파(淸西派)의 우두머리로 다시 등용되었다. 대사간·도승지(都承旨)·대사헌·대사성·대제학 등을 거쳐 예조·공조·형조·이조 등의 판서를 역임하였으며, 병자호란 때는 판서로서 비변사당상(備邊司堂上)을 겸하였는데 화의를 극력 반대하고 끝내 주전론(主戰論)을 펴다가 인조가 항복하자 낙향했다. 그 후 중국 심양(瀋陽)에 잡혀가 3년간이나 있었는데 심문에도 끝내 굽히지 않아 청나라 사람들이 그 충절에 감동하여 돌려보냈다고 한다. 청나라에 잡혀갈 때 지었다고 하는 시조가 널리 알려져 있다. 귀국 후 좌의정에 제수되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문집으로 시문과 「조천록(朝天錄)」·「남사록(南槎錄)」·「청평록(淸平錄)」·「설교집(雪窖集)」·「남한기략(南漢紀略)」 등으로 구성된『청음집(淸陰集)』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김창협(金昌協): 1651~1708. 자는 중화(仲和), 호는 농암(農巖)·삼주(三洲)이며, 본관은 안동(安東),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수항(壽恒)의 아들로 1669년(현종 10) 19세의 나이로 진사가 되고, 1682년(숙종 8) 증광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집의(執義)·헌납(獻納)·대사간(大司諫)·동부승지(同副承旨)·대사성(大司成) 등을 역임하고, 청풍부사(淸風府使)로 있을 때인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 아버지 수항이 진도(珍島)에 유배된 뒤 사사(賜死)되자 영평(永平)의 산중에 은거하였다.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가 일어나자 아버지의 죄가 풀리고 그는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임명되었으나 관직을 받지 않았으며, 그 후에도 대제학(大提學)·예조판서·돈령부지사(敦寧府知事) 등 여러 차례 관직이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그는 벼슬보다 문학과 유학(儒學)의 대가로서 이름이 높았고, 당대의 문장가이며 서예에도 뛰어났다. 그의 학설은 이기설(理氣說)로 이이(李珥)보다는 이황(李滉)에 가까웠으며, 호론(湖論)을 지지하였다. 숙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고, 양주(楊州)의 석실서원(石室書院), 영암(靈巖)의 녹동서원(鹿洞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저서로는 『농암집』·『농암잡지(農巖雜識)』·『주자대전차의문목(朱子大全箚疑問目)』 등이 있다.

김수증(金壽增): 1624∼1701. 자는 연지(延之), 호는 곡운(谷雲)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1650년(효종 1)에 생원에 합격하고, 그 뒤 형조정랑(刑曹正郞)·공조정랑(工曹正郞) 등을 역임하였다. 젊어서부터 산수를 좋아하여 금강산 등 여러 곳을 유람한 뒤 기행문을 남기기도 하였으며, 1670년(현종 11)에는 지금의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영당동에 농수정사(籠水精舍)를 지었다. 그 뒤 1675년(숙종 1)에 성천부사로 있던 중, 동생 수항(壽恒)이 송시열(宋時烈)과 함께 유배되자 벼슬을 그만두고 농수정사로 돌아갔다. 글씨와 그림에 관심을 기울였고 성리학에 심취하여 북송(北宋)의 성리학자들과 주자의 성리서를 탐독하였다. 춘천의 춘수영당(春睡影堂)에 제향되었으며, 문집에 『곡운집(谷雲集)』이 있다.
문중소개
내용없음
문중 관련이미지
이전 다음
카피라이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