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시사 2 스크랩
2절. 고려시대 유학의 발전

1. 고려 초기의 유학
고려 태조 왕건(王建)은 삼국을 재통일하여 정치 사회적 안정을 달성한 업적을 이룬데다가, 종래의 교학과 민간신앙을 지지하는데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고려사』에 의하면, 태조 19년에는 이미 천하를 평정하고 신자들이 예절을 알도록 하고자하여 몸소 『정계(政戒)』1권과 『계백료서(誡百寮書)』8편을 지었다고 하나 전하지 않는다. 이밖에 후사를 위하여 『신서(信書)』와 『훈요십조(訓要十條)』를 지었는데 모두 『고려사』에 실려 있다. 그 10조에 “나라에서나 집에서나 편안할 때를 경계하고 경사를 박람(博覽)하고 옛날을 거울삼아 오늘을 조심하라. 주공은 대성이로되 『무일(無逸)』 한 편을 지어 성왕에 진계(進戒)하였으니, 마땅히 그것을 게시하여 출입할 때 보고 반성하게 하라.”고 하였다. 태조는 경사와 정치를 밀접한 관계로 여겨서 『서경』 「무일」편으로 치국자의 계명으로 삼았던 것이다.
태조의 상문(尙文)ㆍ숭유(崇儒)적 정신은 제4대 광종과 6대 성종에 의해 계승되었다. 백관의 의관을 중국 제도를 따르게 하였던 광종은 과거를 실시 (958년), 시ㆍ부ㆍ송ㆍ책의 제술과(製述科)를 두고, 『주역』ㆍ『상서』ㆍ『모시』ㆍ『춘추』로 고시하는 명경과(明經科)를 두었다. 우리나라 과거법은 이에서 시작된 것이다.
고려의 역대 왕 가운데 가장 유학을 숭상하였던 성종 때에는 유신 최승로가 있었다. 그는 왕을 보필하여 모든 정치를 반드시 유교적인 규범에 준거하고자 하였다. 최승로는 성종 원년, 왕에게 시무책 28조를 지어 올렸는데, 유가의 교학과 정신을 국내에 강화하려는 것이었다.
같은 왕 5년에 주공ㆍ공자의 교(敎)를 급선무로 삼아야 한다고 하여 태학의 중수를 명하고 널리 주ㆍ군ㆍ현의 자제를 모집하여 서울에 유숙하면서 공부하게 하였고, 그 후에는 경학ㆍ의학박사를 양주, 광주 등 12목에 배치하여 시골에 있는 학생들을 교도하게 하였다. 9년에는 서경(평양)에 수서원(修書院)을 설치하고, 이 해에 다시 개경에 국자감을 창설하였다. 수서원은 사적(史籍)들을 간직하던 곳이므로 일종의 도서관 성격이고, 국자감은 현재의 대학이다.
성종은 학교 교육 이외에도 사회교화에 힘썼다. 노약자를 구휼하였으며, 효순절의(孝順節義)의 덕행이 있는 이를 정표(旌表)하였다. 성종은 즉위 초부터 모든 시책의 실시를 반드시 유교의 예전에 의거하였고, 간혹 학자를 송나라에 파견 유학시켜 그 문물을 수입하였다.
제8대 현종은 유신 최항(崔沆), 김심언(金審言) 등에 명하여 태조 이하 7대의 실록을 찬수하게 하였고, 또 선유를 표장하는 사업도 실시하였다. 최치원과 설총을 추증하여 문묘에 종사케 하였다. 우리나라 유학자들의 문묘 배향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제10대 정종은 학문을 진흥시켰고, 특히 서적의 간행이 많았다. 동왕 8년(1042년)에 왕명으로 양(兩)『한서』와 『당서』를 간행하였고, 동왕 11년에는 『예기정의(禮記正義)』 70질과 『모시정의(毛詩正義)』40질을 간행하여 한 질은 어서각에 보관하고 나머지는 문신들에게 하사하였다.

2. 고려 중기의 유학
고려의 문운(文運)은 11대 문종시대에 가장 왕성하였다. 그는 유교와 불교를 다 같이 존중하였다. 흥왕사를 창건하는가 하면, 국자감에 나아가 공자의 신위에 재배하기도 하였다. 이 시대의 학술은 사학의 융성에 특징이 있다. 당시의 유신 최충(崔冲)이 만년에 세운 사숙인 문헌공도(文憲公徒)를 비롯한 12개의 사학이 있었다. 최충은 학생들의 성취도에 따라 구재(九齋)로 나누어 학생들을 교수하였다. 구재의 학과는 구경ㆍ삼사를 위주로 하였고, 자연 기송ㆍ사장에 치중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귀족 자제들은 여기에 들어가 과거에 응시할 준비를 하였다고 한다. 이외에도 문종 연간에는 정배걸(鄭倍傑), 노단(盧旦), 문정(文正), 박인량(朴寅亮), 김근(金覲) 등이 시문에 능하여 저술을 남겼다고 한다.
사학이 융성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국학은 일시 침체를 면치 못하였다. 숙종 7년의 정승 소태보(邵泰輔)는 국학을 폐지하자고 건의한 일까지 있었다. 학문을 좋아하고 서적을 애호하였던 숙종과 예종은 국학의 진흥에 힘을 기울였다. 특히 예종은 즉위 4년 (1109년)에 7재를 국학에 설치하고 학생을 시험 선발하였다. 7재는 『주역』, 『상서』, 『모시』, 『주례』, 『대례』, 『춘추』, 『무학』이었다. 이로 볼 때 국학은 유학 중심의 교육을 시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동왕 14년에는 양현고(養賢庫)를 국학에 설립하여 선비를 양성하는데 이바지하였다. 그는 또 학생을 송나라에 파견하였고, 청연각ㆍ보문각을 궐내에 설치하고 학사를 배치하여 서적을 수집하고 경사를 연구케 하였다. 그리하여 전조에 비하여 유학에 뛰어난 학자들이 배출되었는데, 대표적으로 김인존(金仁存), 박승중(朴昇中), 김부식(金富軾), 윤언이(尹彦頤), 정지상(鄭知常), 이인실(李仁實), 권적(權適) 등이 있다.
이 가운데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찬진하였고, 윤언이는 역학에 정통하여 『역해』를 저술하였다. 이인실은 『춘추강의』를 지었으나, 윤언이의 책과 함께 지금 전하지 않는다. 권적은 예종 때 임금의 명을 받고 송나라에 7년 간 유학하였고, 송의 휘종(徽宗)이 친림한 과거에 갑과 제일로 선발되었다.
제17대 인종도 숭문호학(崇文好學)의 군왕이었다. 그는 국자감의 학제를 더욱 정비하여 개경에 육학의 제도를 완비하고, 각 지방은 향학을 세웠으니, 이것은 향교의 제도가 이 때 전국으로 퍼진 것이다. 그는 또 『효경』과 『논어』를 여항에 나누어주어 교육의 보급을 도모하였다. 경사의 육학은 국자학, 태학, 사문학(四門學), 율학, 서학, 산학인데 모두 국자감에 속하였다.
광종 때 시작된 과거제도 역시 완비되었음은 물론이다. 그 대강을 살피면 다음과 같다. 과거의 과목은 제술, 명경의 두 가지 이외에도 의, 복, 지리, 율, 산, 서, 삼례[예기ㆍ주례ㆍ의례], 삼전[좌전ㆍ공양전ㆍ곡양전], 하론(何論) 등 잡업(雜業)이 있었다. 제술업(制述業)은 진사과라고도 하는데, 시, 부, 송, 책으로 시험하고 혹 경의로 시험하기도 하였다. 예종 때 한때 국학에 무학재를 설치하여 무사들을 교육한 뒤에 선발하기도 하였지만 무학재의 생도들의 학업이 부진하더라도 그것을 통하여 관직을 받기가 수월했지만, 문사들에 의하여 천시되면서 문학과 무학 사이에 대립 양상이 벌어진 결과 인종 때에는 무학재를 폐지하고 말았다.
고려 시대에 과거법이 시행된 이후 좌주(座主)ㆍ문생(門生)의 풍습이 생겨, 말기까지 계속되었다. 좌주와 문생은 실상 선생과 제자의 호칭인데, 이 시대에는 급제자가 장시자(掌試者)를 은문(恩門)ㆍ좌주(座主)라 하고, 자신을 그 문생이라고 칭하였고, 문생은 좌주에 대하여 부자 사이와 같은 예로 대하여, 그 예법이 매우 엄정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장시자와 예속 관계를 맺어 출사의 길을 도모하는 수단으로 변질되는 폐단도 적지 않았다.
예종ㆍ인종 양대의 숭문호학의 풍습은 그 다음 임금인 의종 대에 이르러 문신들의 지위를 극도에 이르게 하였다. 이 때문에 문신들은 물론 임금도 무신들을 멸시하였다. 게다가 불법을 받든다고 하면서 도참설에 빠져 헤어날 줄 몰라 국고가 탕진될 지경이었다. 문신들의 업신여김에 불만이 누적된 정중부(鄭仲夫) 등 무신들이 무신의 난을 일으켰다.
이후 80여 년간은 정권이 무신의 손아귀에 들어가 서로 교대하여 발호하였다. 하극상의 풍조가 가득하였고 사회 질서가 매우 문란하였다. 이전 시대의 찬란하였던 문교가 암흑기로 접어들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명종 말년에 최충헌(崔忠獻)이 정권을 잡았는데, 그는 어느 정도 문사를 애호하여 대접하였기 때문에 문인 학자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이 시기에 최씨의 비호를 받으면서 성장하였던 문인이 이인로, 금의, 이규보, 진화 등이었다. 그러나 무신들이 정권을 주도하는데 기생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사회적 영향력은 매우 제한적이었고, 따라서 그들의 작품은 진취적인 기상이 적고, 청담ㆍ초탈적인 분위기로 염세적 경향이 강하였다고 한다.
고종 18년(1231)에는 몽고의 침입이 있었다. 그 다음해에 최충헌의 아들 최이(崔怡)가 왕을 권하여 강화도로 천도하였다. 이러한 중에도 고종 30년(1243)에는 국학을 수리하고 양현고를 확충하며, 두 해에 한 번 씩 과거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강도에 국한된 것이고, 다른 지방은 몽고군에 유린되어 교학에 힘쓸 겨를이 없었다. 그리하여 지방의 학교는 전폐되고 문교는 더욱 쇠퇴하였다.

3. 고려 후기 신유학의 수입과 정착
고종 만년에 몽고와 화친 조약을 맺은 다음부터 평화는 보장을 받았으나, 고려는 몽고의 간섭을 받아 독립국가로서의 유지가 어려웠다. 다만 국가가 소강을 얻어 문교에 힘쓸 수가 있었고, 원의 문화(주자학)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 있었다. 그 결과 우리나라 유학의 면모가 일신되어 문교가 일어나고, 특히 불교에 대항할 수 있는 유학의 세력이 확장되었다.
원종은 1270년에 개경으로 환도하고, 그 다음 해에 동ㆍ서 학당을 도성 안에 설치하고 국학을 중수하였다. 그를 계승한 충렬왕은 6년(1280)에 경사교수 7인을 특별히 임명하여 국학생의 교수에 전념토록 하였다. 동왕 23년에는 경사교수도감(經史敎授都監)을 설치하고 7품 이하의 관원을 학습하게 하니, 이것은 조신들을 교육하기 위한 것이었다. 고려 중기 문교가 흥성하였을 때에는 사장만을 숭상하였고, 과거 시험도 제술을 귀하게 여기고 명경은 천시하였었다. 충렬왕 때에 이르러 경사에 유의한 것은 확실히 종래 학풍에 대한 반성의 결과였다.
당시에 유명한 문신들로는 이승휴가 있었다. 동왕 13년에 그는 『제왕운기(帝王韻記)』를 제진(製進)하였는데, 중국과 우리나라를 역사를 읊은 서사시였다. 또 같은 시기에 유신 민지(閔漬)는 권보(權溥)와 함께 정가신(鄭可臣)이 일찍이 찬술한 『천추금경록(千秋金鏡錄)』을 증수하여 『세대편년절요(世代編年節要)』라고 하였는데, 내용은 고려의 건국으로부터 원종 때까지의 기사를 7권에 나누어 기록한 것이라고 한다. 민지는 별도로 『본국편년강목(本國編年綱目)』을 편찬하였는데, 고려 태조의 증조로부터 고종 때까지의 사실을 42권에 걸쳐 수록한 것이었다. 민지의 두 저서는 지금 전해지지 않지만, 학풍의 변화 시기에 사서의 편찬은 주목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충렬왕 30년(1304년)에는 국학의 대성전(大成殿)을 개축한 뒤에, 왕이 몸소 대성전에 나아가 공자를 뵙고, 생도들을 격려하였다. 동시에 섬학전(贍學錢)을 국학에 설치하여 학사 양성 비용으로 충당하였다. 이것은 안향의 주청에 의한 것이었다. 이로부터 문교 부흥의 기풍이 나날이 증대되었다.
안향은 1243년에 태어나 1306년에 세상을 떠났다. 호는 회헌, 경상도 순흥 사람인데 소시부터 학문을 좋아하였다. 원종 초에 급제한 뒤에 한림학사가 되었다. 국학을 중수한 뒤에 양현고의 운영 기금이 부족하자, 관원들이 모금하여 섬학전을 설치하도록 건의하여 임금과 문무 관원들이 모두 참여하였다. 안향은 충렬왕 16년(1290)에 연경에서 처음으로 주자서를 얻어 보고 잠심(潛心)하여 연구한 뒤에, 그 책과 함께 주자의 초상을 모사(模寫)하여 갖고 왔다. 당시에는 원이 남송을 멸망시키고 천하의 명유를 초빙, 유학을 장려하여 정주학이 북중국에도 유행하였던 때였다. 따라서 연경에 갔던 안향도 주자서를 구해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 주자학이 입수되기는 안향이 처음인데, 그는 이를 갖고 수많은 문생들에게 교수하였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충숙왕 6년(1319)에 안향을 문묘에 종사한 것은 이 때문이다.
안향의 문도로서 주자학을 전파한 이로 백이정(白頤正)과 우탁(禹倬), 권보가 대표적이다. 백이정은 충청도 남포 사람으로 충선왕 때에 벼슬하였다. 백이정은 왕을 따라 원에 들어가 10년간 있는 동안 정주 성리서를 많이 구하여 돌아와, 이제현(李齊賢), 박충좌(朴忠佐) 등에게 가르쳤다.
우탁(1262~1342)은 단양 사람으로 벼슬은 성균 좨주(成均 祭酒)를 지냈다. 경사에 능통하였는데, 특히 역학에 밝았다. 주역 경전이 우리나라에 들어 왔을 때, 혼자 한 달 여를 연구한 끝에 해득하고 생도들을 가르치니, 성리학의 오의(奧義)가 차츰 행하여 졌다.
권보(1262~1346)는 18세에 급제하여 도첨의사사사(都僉議使事)를 지냈다. 평생 독서에 열중하였는데, 일찍이 『주자집주』의 간행을 건의하여 성리학의 보급에 힘썼다. 또 『효행록』을 찬술하였다고 한다.
송학의 동점기(東漸期)에 유의할 것은 중국으로부터 많은 서적이 새로 들어 왔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충숙왕 원년(1314)에는 국학에서 박사를 중국 강남에 보내 경적 1만 8백 권을 구입해 왔고, 같은 해에 원의 황제는 송나라 비각의 장서 4천 3백여 책을 포함 1만 7천여 권을 기증해 보내 왔다. 『고려사』 충숙왕 원년 조에는 강남에서 서적을 구입한 기사가 있는데, 권보 등이 성균관에 모여 새로 구입한 서적을 살피고, 경학을 시험하였다고 하였다. 이 해에 또 상왕 충선왕은 원의 연경에 가서 만권당(萬卷堂)을 짓고, 경사와 제가서를 모두 구입하여 비치하였다. 당대 원의 석학인 요수(姚燧), 염복(閻復), 조맹부(趙孟頫) 등과 교유하면서 본국의 문신 이제현을 불러서 함께 연구케 하였다.
이제현(1287~1367)은 고려 후기를 대표하는 문호이고 정치가이다. 호는 익재(益齋)로 백이정의 문인이고 권보의 사위였다. 15세에 급제하였는데, 특히 경적에 밝았다. 전기한대로 원나라 유학자들과의 교제를 통하여 학문이 더욱 넓어졌다. 당시에는 그를 유학의 종장이라고 하였다. 그는 고문학을 배창하였고, 시, 서, 화 삼절로 유명하였다. 저술로 『익재난고』가 있다.
주자학의 정착에 따라 고려 말기에 새롭게 일어난 사상적 경향이 있다. 그것은 불교를 배척하는 벽이단의 경향이다. 이제현 이후 학계와 정계를 통하여 영향력을 발휘한 이는 이색(李穡)과 정몽주(鄭夢周)인데, 이들은 안향 이후, 백이정, 이제현으로 이어지는 주자학의 영향을 받아 억불숭유(抑佛崇儒)의 주장이 강하였던 이들이다. 그만큼 주자학의 이념이 철저해졌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색(1328~1328)은 이곡의 아들로서 호가 목은(牧隱)이다. 가업을 계승하여 수년간 원에 유학하였고, 공민왕 때에 귀국하여 시사를 논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학교를 진흥하여 학문을 높이고, 이단을 배척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의 이단 배척은 다만 승려들의 비행을 배척한 것으로서 불교 자체에 대한 공박의 수준까지 이르지는 않았지만, 이단에 대한 배척의 경향으로는 최초로 보이는 것이었다.
공민왕 16년(1367)에는 성균관 대사성이 되어 학생을 증원하고 경술이 뛰어난 김구용(金九容), 정몽주, 이숭인(李崇仁) 등을 선발하여 교수로 임명하였다. 다시 학제를 개편하여 오경사서재(五經四書齋)로 나누어 등급에 따라 교육하여 국학이 다시금 진흥되었으며 의리와 격치(格致)의 학문, 즉 송학이 차츰 흥성하였다.
교수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이가 정몽주와 이숭인이었다. 특히 정몽주는 ‘달가(達可:정몽주)의 논리는 횡설수설이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 없다’라는 칭찬을 이색으로부터 받았다. 이색은 문인을 많이 배출하였는데, 박상충(朴尙衷), 정도전(鄭道傳), 권근(權近), 하륜(河崙), 길재(吉再) 등이 모두 그의 문하에서 나왔다.
정몽주(1337~1392)는 공민왕 때에 급제하여 벼슬이 시중에 이르렀다. 그는 학관으로 있으면서 강설이 탁월하였는데, 뒷날 호병문의 『사서통(四書通)』이 수입되었을 때, 살펴보니 그의 소론과 합치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뒷날 후인들에 의하여 그는 동방이학의 시조라는 평을 받을 정도로 송학에 투철하였다. 그는 학문만이 아니라 정치에서도 반드시 유교적 규범을 시행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이단 배척을 자기의 임무로 알았다. 그는 불심이 깊은 공양왕이 즉위한 다음 불승을 왕사로 맞이하려 하자, “불교는 친척을 버리고 홀로 암굴에서 관공적멸(觀空寂滅)을 위주로 하니, 어찌 평상의 도리라고 하겠습니까?”라고 하여 반대하였다. 충렬왕이 학교를 중수하고 문교를 권장하는 과정에서 송학을 수입하여 유자들이 배출되면서 유교의 세력이 점점 커져 불교에 대항할 수 있게 성장한 것이다. 성균관은 이단 배척의 중심지가 되었고, 교수와 학생들이 모두 이에 열중하였다.
공양왕 2년에는 정몽주가 시중이 되어 유교 예속을 일반 사회에 확대하려고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가묘를 사서인(士庶人)의 가정에 세우고 신주를 받들어 조상의 제사를 받들도록 주청하였다. 이것이 『주자가례』를 우리나라에 적용한 최초의 일이다. 물론 주자학의 전래에 따라 『가례』는 이미 유가적 지식인들이 준용한 사례가 있었다. 문익점(文益漸), 윤귀생(尹龜生), 정습인(鄭習仁), 전오륜(全五倫) 등이 부모상을 당하여 모두 3년간을 시묘하였고, 상서의 제절을 모두 『가례』를 사용하였다. 이를 보아 주자학을 중심으로 한 유교의 세력이 상당히 확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정몽주는 정치적으로 복잡하였던 국내 정세를 회복하고, 외교 문제에도 수완을 발휘하여 명과 일본을 상대로 하여 어려운 일을 수차 타결하였다. 그러나 고려의 운이 쇠함에 따라 대세를 만회할 길이 없었다. 결국 이성계를 추대한 혁명파에 의해 그가 살해되면서 고려는 망하였다. 조선 중종12년(1517) 조광조 등의 주청에 의하여 문묘에 종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