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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절 고구려 영토에서 신라 영토로
고구려․백제․신라 등의 3국이 처음 성립한 것은 기원전 1세기의 일이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는 서기전 37년에 주몽(朱蒙)이 부여에서 내려와 압록강 중류에서 나라를 세웠고, 백제는 서기전 18년에 고구려에서 내려온 온조(溫祚)가 오늘의 한강 유역인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웠으며, 신라는 서기전 57년에 오늘의 경주 평야에서 6촌 세력을 중심으로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왕으로 추대하여 나라를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결국 백제는 마한 54소국 중에서 백제국(佰濟國)이 점차 성장하여 주변의 소국들을 차례로 정복하여 성장한 나라이고, 신라는 진한 12소국 중에서 사로국(斯盧國)이 성장하여 점차 세력을 확대하여 군장국가 혹은 성읍국가 단계를 거치고 드디어 강력한 왕권을 가진 정복국가로 발전한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사로국(신라)은 진한의 여러 소국 가운데 그 세력이 가장 강성하여 1세기 후반부터는 주변의 여러 소국들을 병합하여 영토국가를 이룩하였다. 그리하여 탈해왕 때에 우시산국(于尸山國, 지금의 영해)과 거칠산국(居柒山國, 지금의 동래)을 정복하였고, 파사왕 때에는 음즙벌국(音汁伐國, 지금의 안강)과 비지국(比只國, 지금의 창녕), 다벌국(多伐國, 지금의 대구), 초팔국(草八國, 지금의 합천 초계) 및 굴아화촌(屈阿火村, 지금의 울산)을 병합하였으며, 실직(悉直, 지금의 삼척), 압독(押督, 지금의 경산)의 두 나라가 항복하여 옴으로써 그 영토를 확장시켰던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고분 분포를 통하여 대구․경산․창녕․합천지방은 이후 6세기까지도 독자적인 정치세력이 존재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므로, 초기 신라의 영토는 동해안 삼척에서 울산에 이르는 지역과 경주․안강 일원이 되었을 것으로 이해한다.
이후 5세기경 삼국의 판도는 고구려가 북쪽으로 만주지방에 크게 영토를 넓힌 연후에 남쪽으로 한강 유역까지 진출하였고, 백제는 남쪽으로 계속 진출하여 오늘의 경기․충청․전라도에 이르기까지 영토가 넓어졌으며, 신라는 북쪽으로 소백산맥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낙동강까지 진출하여 오늘의 경상남북도를 거의 장악하였다. 오늘의 영양지방이 신라 영토에 편입된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아달라왕 3년(156)에 계립령(鷄立嶺, 지금의 문경 새재)을 개척한 사실과 나해왕 27년(222)에 우두주(牛頭州, 지금의 춘천)에서의 나․제 충돌 외에 기림왕 3년(300)에 우두주 태백산(太白山)에서의 제사행사 등을 통해서 이때에 영양지방이 신라 영토에 편입되었음은 확실하다. 그리하여 한강유역으로 진출하려는 신라와 이를 사수하려는 백제 사이에 잦은 충돌이 있었으나,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정책으로 나․제의 세력이 위축되고, 드디어 신라는 소백산맥 이남의 영토마저 위협받게 되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5세기 중엽에 신라의 북쪽 경계는 오늘의 강릉[何瑟羅城]에서 충주에 이르는 선이 되었는데, 오늘의 경상북도 지역 중에서도 예천․문경지방은 백제 영토에 편입되어 있었다. 그런데 신라 눌지왕 34년(고구려 장수왕 38년, 450년) 오늘의 삼척[悉直原]에서 고구려의 변장이 피살된 사건을 계기로 고구려의 남하가 본격화하였다. 고구려는 장수왕 56년(468)에 오늘의 삼척지방을 점령하였고, 동왕 63년(475)에는 드디어 한강을 넘어 백제의 수도였던 한성(漢城)을 공격하여 백제의 개로왕을 전사시켰다. 그리고 장수왕 69년(481)에는 고구려가 말갈과 더불어 군사를 일으켜 동해안으로 오늘의 흥해[彌株夫]까지 진출하였으며, 내륙으로는 청송[狐鳴城]을 비롯하여 안동․문경․예천․서산․당진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러므로 오늘의 영양지방도 이때에 고구려 영토에 편입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에 신라에서는 고구려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하여 백제와의 동맹관계를 더욱 굳게 다지는 한편으로 삼년산성․굴산성을 개축하는 등으로 노력하였으나, 신라왕의 통치 범위는 오늘의 선산지방[一善界]에 미치고 있을 뿐이었다. 5세기 말경의 삼국의 경계는 『삼국사기』지리지를 통해서 더욱 구체적으로 파악될 수 있다.
먼저 『삼국사기』지리지에서 소백산맥 남쪽에 위치한 군․현들에 대해서 살펴보면, 지금의 영풍군을 “백제의 나기군(奈己郡)으로”, 지금의 예안면을 “고구려 매곡현(買谷縣)으로”, 지금의 봉화군을 “고구려의 고사마현(古斯馬縣)으로”, 지금의 풍기읍을 “고구려의 급벌산군(及伐山郡)” 혹은 “고구려의 이벌지현(伊伐支縣)으로”, 안동군 임하면을 “고구려의 굴화군(屈火郡)으로”, 청송군 안덕면을 “고구려의 이화혜현(伊火兮縣)으로”, 진보면을 “고구려의 조람현(助攬縣)으로”, 청기면을 “고구려의 청기현(靑杞縣)으로”, 영덕군을 “고구려의 야시홀군(也尸忽郡)으로”, 영해면을 “고구려의 우시군(于尸郡)으로”, 영일군 청하면을 “고구려의 아혜현(阿兮縣)으로”, 지금의 울진군을 “고구려의 우진야현(于珍也縣)으로”라는 내용을 살필 수 있을 뿐 아니라 같은 내용을 『고려사』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볼 수 있으므로 당시 고구려의 신라 영토 지배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그후 신라는 고구려에게 점령당한 북쪽의 영토를 수복하기 위하여 끈질기게 노력하였다. 신라 소지왕 15년(493)에는 백제의 동성왕과의 사이에 혼인동맹을 맺고, 백제군의 지원을 받아 여러 지역에서 고구려에 대항하였으며, 지증왕 4년(503)에는 나라 이름을 신라(新羅)로 정하고, 이듬해에는 국경지방에 무려 12성을 축조하여 국방을 튼튼히 하였을 뿐 아니라 동왕 6년에는 이사부(異斯夫)장군으로 하여금 동해안으로 진출케 하여 드디어 오늘의 삼척지방을 수복하고 그 곳에 실직주(悉直州)를 설치하였다. 이로써 약 25년간 고구려의 지배를 받았던 동해안이 다시 신라 영토가 되었다. 지난 1988년에 울진군 죽변면 봉평리에서 우연하게 신라 때 만든 비석이 하나 발견되었는데, 그 내용에 신라의 동해안 수복 과정이 잘 설명되어 있다.
울진 봉평비는 신라 법흥왕 11년(524)에 건립되었으며, 그 내용 중에 과거에 신라에 속해 있었던 백성들이 얼마동안 고구려의 지배를 받았으나, 다시 신라에 예속되었으므로 앞으로는 신라의 법을 따르라는 국왕의 명령이 있었음을 알 수 있고, 이에 신라 6부 사람들이 모여서 얼룩소를 잡고 술을 빚어 제사하였으며, 그 사실을 비에 기록하여 세움으로써 지방민들을 일깨우려는 목적이 있었음을 보게 된다. 그리하여 동해안으로는 왕이 직접 현장을 순행할 정도로 평정되었으나, 내륙으로는 아직도 고구려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법흥왕 12년(525)에는 오늘의 상주지방에 진출하였고, 동왕 19년(532)에는 남쪽으로 오늘의 김해지방에 위치한 금관가야(金官伽耶)를 복속시켰으며, 서쪽으로도 낙동강 유역까지 진출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신라가 내륙에서 고구려에 상실한 옛 영토를 다시 수복한 것은 진흥왕 때의 일이었다.
진흥왕은 신라 역사상 가장 영토를 많이 넓힌 정복군주로서 동왕 11년(550)에 고구려와 백제가 다투는 틈을 이용하여, 고구려로부터 도융성(道戎城)을 빼앗고, 백제로부터 금현성(金峴城)을 차지한 것을 시작으로 이듬해에는 한강의 상류인 오늘의 청주지방을 점령하고, 동왕 14년(553)에는 백제와 연합하여 한강 유역의 전지역을 점령하여 그 상류에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김무력(金武力)을 군주(軍主)로 임명하여 그곳을 방어하게 하였다. 이로 보아 오늘의 영양지방이 고구려 지배에서 벗어나 신라 영토로 다시 편입된 시기는 550년 전후가 될 것이므로 무려 70여 년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서 다시 진흥왕의 창녕척경비를 통해서 당시의 지방통치구조를 살펴보면 창녕비에는 진흥왕이 이 지방을 순행할 때에 이에 참가한 신하들을 구체적으로 기록하였는데, 군주(軍主) 4명과 대등(大等) 6명 외에 당주(幢主)․도사(道使)․외촌주(外村主) 등의 관직명을 살필 수 있다. 먼저 군주에 대하여는 처음 지증왕 6년에 이사부를 실직주 군주로 임명한 것을 계기로『삼국사기』신라본기의 진흥왕의 기록에서 하슬라주군주(何瑟羅州軍主)․사벌주군주(沙伐州軍主)․관산성군주(管山城軍主)․신주군주(新州軍主)․비열홀주군주(比列忽州軍主)․감문주군주(甘文州軍主) 등을 살필 수 있고, 창녕비에는 비자벌군주(比子伐軍主)․한성군주(漢城軍主)․비리성군주(碑利城軍主)․감문군주(甘文軍主) 등을 보게 되는데, 군주가 신라 시대에 지방 최고의 관직임을 알 수 있으나, 그 설치지역은 일정한 구역이 미리 설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때에 따라 필요에 의하여 설치되고 있으므로, 지방행정관으로서보다 군사령관의 성격을 가졌음을 알게 된다.
다음 대등 혹은 사대등(使大等)의 경우에는 각 주에 2명씩 배치되고 있으나, 그 신분에 차이가 있음에서 각기 다른 임무를 맡은 관리로 추정되고, 당주(幢主)는 특정 지방에 파견되어 있는 군단의 지대장(支隊長)의 신분이었을 것으로 추측하며, 앞의 사대등과 당주는 관등상으로 동일한 직급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도사(道使)는 남산신성비에서 노함촌도사(奴含村道使)․영점촌도사를 볼 수 있으므로 도사는 일명 촌주(村主)로도 부르게 된 것을 알 수 있고, 지방의 행정 및 노력동원을 지휘한 관직으로 이해한다. 그런데 신라 당시에 오늘의 영양지방에 어떤 지방관이 파견되었는지는 파악이 불가능하다. 다만 신라의 진흥왕 때부터 지방에까지 군․현이 설치된 사정과 오늘의 안동지방 일부가 열혜현(熱兮縣)이 되었고, 청송군 진보지방이 칠파화현(漆巴火縣)이 되었으며, 오늘의 봉화읍이 고사마현(古斯馬縣)이였고, 영양지방은 고은현(古隱縣)이었다.
제2절 부곡(部曲)의 설치
삼국통일 이후에 신라의 지방제도는 전국을 9주(州)로 개편하였다. 그 내용을 보면 옛 신라 영토에 사벌주(沙伐州, 주치는 尙州)․삽량주(歃良州, 주치는 梁山)․청주(靑州, 주치는 晋州)를 두었고, 옛 고구려 영토에는 한산주(漢山州, 주치는 廣州)․수약주(首若州, 주치는 春川)․하서주(河西州, 주치는 江陵)를 두었으며, 옛 백제 영토에는 웅천주(熊川州, 주치는公州)․완산주(完山州, 주치는 全州)․무진주(武珍州, 주치는 光州)를 두게 되었다. 그리하여 각 주에는 중앙에서 진골의 신분을 가진 자로서 도독(都督)을 파견하여 다스렸으며, 주 밑에는 군(郡)과 현(縣)을 두고, 각각에 군태수(郡太守)와 현령(縣令)을 파견하였는데, 이들도 중앙에서 6두품 출신을 임명하였다. 통일신라 시대에 오늘의 영양지방은 하서주 소속이었다.『三國史記』35, 지리지 2 명주(溟州)조에서 보면 “이 곳은 선덕왕 때에 소경(小京)으로 하여 사신(仕臣)을 두고, 태종 무열왕 5년(658)에 하슬라의 땅이 말갈에 연접하므로 소경을 파하여 주(州)로 하고 군주를 두어 이를 진수하고, 경덕왕 16년(757)에 명주로 고치게 되어 그대로 부른다”고 하였다. 그리고 하서주 소속의 군현에 임하군(臨河郡, 지금의 靑松郡)․안덕현(安德縣, 지금의 靑松 安德)․영덕군(盈德郡)․조람현(助攬縣, 지금의 靑松 眞寶)․청기현(靑杞縣, 지금의 靑松)․우시군(于尸郡, 지금의 盈德 寧浦) 등이 포함되었다.
그리고 『삼국사기』37, 지리지 4의 하슬라주(何瑟羅州)조에서도 야시홀군(也尸忽郡, 지금의 盈德)․조람군(助襤郡, 지금의 眞寶)․청기현(靑杞縣, 지금의 靑松)․굴화현(屈火縣, 지금의 安東)․이화혜현(伊火兮縣, 지금의 靑松 )․우시군(于尸郡, 지금의 寧海) 등의 명칭을 볼 수 있는데,『고려사』57, 경상도편에는 “예주(禮州) 본 고구려 우시군(于尸郡) 신라 경덕왕 개위 유린군(有隣郡)”이라 하고, 그 아래에서 “영양군 본 고은현……”이라 하였다. 한편 조선 시대의 지리서 중에서 세종 7년(1425)에 편찬된『경상도지리지』및 단종 2년(1454)에 편찬된『세종실록지리지』에서도 대체로 같은 내용을 살필 수 있고, 중종 25년(1530)에 편찬된『신증동국여지승람』24 영해도호부편의 속현조에서는 “영양현은 부의 서쪽 84리에 있다. 본래 고은현(古隱縣)이었던 것을 뒤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군(郡)으로 하였다. ……청기현(靑杞縣)은 부의 북쪽 99리에 있다. 본래 대청부곡(大靑部曲)은 예전에 청부현(靑鳧縣)에 속하고, 소청부곡(小靑部曲)은 영양현에 속하였다. ……”라고 하여 영양의 역사를 구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를 수록하였다. 오늘의 영양지방이 고은현이였다는 사실은『경상도읍지』에 수록된 <영양현읍지(英陽縣邑誌)>를 통해서도 살필 수 있다.
① 建置治革 : 本新羅古隱縣 …….
② 古蹟 : 首比部曲在縣北四十里本屬英陽 ……. 注谷部曲在縣北二十里 大靑部曲小靑部曲皆在靑杞
靑杞古縣在縣西二十里本大靑部曲舊屬靑鳧縣 小靑部曲屬英陽縣…….
이상의 여러 기록을 통해서 영양군이 한때 고은현이었던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나, 그 설치 시기가 문제인데,『삼국사기』신라본기를 통해서 소지왕 3년(481)부터 고구려의 지배를 받아오던 동해안지방은 지증왕 6년(505)에 이사부의 활약에 힘입어서 오늘의 삼척까지 수복하였으나, 내륙으로는 법흥왕 때에 일선군(一善郡, 지금의 선산), 사벌주(沙伐州, 지금의 상주)까지 겨우 왕권이 미칠 정도였고, 진흥왕 12년(551)에 이르러 비로소 한강 상류를 차지하여 동왕 18년에 오늘의 충주지방에 국원소경(國原小京)을 설치하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의 영양지방에 고은현이 설치된 것은 진흥왕 12년경이 될 것이다. 그후 신라는 문무왕 15년(675) 북부지방의 옛 고구려 영토에 대한 주․군 정비가 있었고, 다시 신문왕 4년(684)에서 7년(687) 사이에 9주 5소경을 설치하고 그 아래에 군․현을 두는 등으로 지방제도의 정비가 있었는데, 영양지방은 여전히 고은현을 유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신라는 경덕왕 16년(757)에 이르러 지방제도에 대한 대대적인 정비를 단행하였고, 이때에 영양지방에도 변화가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서 “대청부곡은 예전에 청부현에 속하고 소청부곡은 영양현에 속하였다.”는 사실과 앞의 인용문 ②에 나타난 <영양현읍지>의 내용(本大靑部曲舊屬靑鳧縣 小靑部曲屬英陽縣)은 영양지방이 부곡(部曲)으로 편제되기 이전에 청부현과 영양현이었음을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부곡의 설치가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였음을 감안하면 청부현․영양현의 설치는 그 이전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히 경덕왕 때 설치된 하서주(河西州)의 25현 중에 이들이 포함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오늘의 영양지방에 부곡이 설치된 것은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의 일이다. 부곡은 군이나 현보다 작은 규모의 행정단위였으며, 그들은 주로 농업에 종사하였으나, 통일신라 시대에는 그들이 노동력으로써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 크지 않았을 것이다. 영양지방에 대한 부곡 설치는 처음 대청부곡․소청부곡(지금의 靑杞面․立岩面․英陽邑 일원)을 두었고, 다시 어느 시기에 수비부곡(지금의 首比面)과 주곡부곡(지금의 日月面)을 두었다.
통일신라는 제36대 혜공왕 때부터 친왕파와 반왕파의 대립이 있었고, 제38대 원성왕부터는 국왕의 직계에서 왕권의 분지화를 가져와서 왕족 상호간에 무력적 충돌이 일어나고, 여기에 귀족들도 정치에 대한 불신이 팽배하여 왕권의 약화를 가져왔다. 한편으로 국왕권이 약화된 사정을 틈타서 일부의 왕족들과 귀족들이 대토지를 소유하여 부를 독점하였으며, 전국에 걸쳐 산재한 수많은 사원들에서도 사원전(寺院田)이란 명목으로 대토지를 소유함으로써 국가의 경제가 위태로웠을 뿐 아니라 많은 농민들이 정전제(丁田制) 등에 기초한 토지를 상실하고 용전(庸田)이나 노예로 몸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형편이 되었다. 이후 제51대 진성여왕 시기에는 오늘의 경상도 지방에만 겨우 국왕권이 미치고 있을 정도였는데, 마침 흉년이 들어 여러 군현에서 조세를 수송치 아니하였고, 이에 세금을 독촉하기에 이르자 사방에서는 농민들이 도적으로 돌변하여 관리들과 충돌하고, 마침내는 국가에 대한 반란으로 발전하였다.
이리하여 진성여왕 6년(894)에는 지금의 광주․전주지방을 중심으로 견훤(甄萱)이 일어나 후백제를 건국하였고, 효공왕 때에는 궁예(弓裔)의 세력이 강성하여져서 지금의 평안도․황해도․경기도에 걸쳐 30여 성을 장악하고 다시 국원(지금의 충주)지방의 10여 성을 탈취하여 동왕 5년(901)에 후고구려를 건국함으로써 우리 한반도에는 후삼국 시대가 도래하였다. 그 후 후백제는 충청도와 전라도의 전역을 차지하였으며, 후고구려는 더욱 강성하여서 국호를 마진에서 태봉으로 고치고 강원․경기도를 장악하였으나 점차 교만해져서 왕은 미륵불이라 칭하고 백성들을 혹사하였다. 이에 경명왕 2년(918)에는 왕건(王建)이 일어나 궁예를 타도하고 고려를 건국하였다. 여기서『삼국사기』와『고려사』의 기록을 종합하여 경상북도 북부지방에서 전개되었던 후삼국 상호간의 전투 및 이 지역 호족들의 동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 904년(孝恭王 8) 7월, 궁예가 상주 등 30여 주군을 공취하니 공주(公州) 장군 홍기(弘奇)가 와서 항복하였다.
■ 905년(孝恭王 9) 8월, 궁예가 신라의 변방을 침탈하여 죽령 동북에 이르니……. 효공왕은 제 성주에게 명하여
삼가 출전치 말고 성벽을 굳게 하여 지키라고 하였다.
■ 907년(孝恭王 11) 일선군(지금의 선산) 이남 10여 성을 모두 견훤에게 빼았겼다.
■ 918년(景明王 2) 7월, 상주의 아자개(阿玆蓋)가 사신을 고려에 보내어 항복하니 태조[王建]는 예의를 갖추어
이를 맞이하였다.
■ 922년(景明王 6) 6월, 하지성(下枝城, 지금의 안동 풍산) 장군 원봉(元奉)이 태조[王建]에게 항복하였다.
11월 진보성(眞寶城, 지금의 청송 진보) 장군 홍술(洪述)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 923년(景明王 7) 11월, 진보성주 홍술이 그 아들 왕립(王立)을 고려에 보내어 갑옷 30개를 바치므로 태조는
왕립을 원윤(元尹)으로 삼았다.
■ 924년(景明王 8) 7월, 견훤이 그 아들을 보내어 대야(大耶)․문소(聞韶, 지금의 의성) 두 성의 군사를 동원
하여 조물성(曺物城, 금릉 조마)를 공격하니 태조가 애선․왕충장군을 파견하여 구원하였다.
■ 925년(景哀王 2) 10월, 고울부(高鬱府, 지금의 영천) 장군 능문(能文)이 태조에게 항복 하였다.
■ 927년(景哀王 4) 1월, 고려 태조가 친히 후백제가 장악 중인 용주(龍州, 예천 용궁)을 쳐서 항복시킬 때 신라
왕은 군사를 내어 이를 도왔다. 3월, 고려 태조가 친히 나아가 근암성(近巖城, 문경 산양)을 정복하였다.
11월, ……. 고려 태조가 친히 기병 5천을 이끌고 내려와 공산 동수(대구 팔공산)에서 견훤의 군대와 격전을
벌였으나 참패하였다. …… 이에 견훤은 전승의 여세를 몰아 대목군(大木郡, 칠곡 약목)으로 진출하여 논에
쌓아둔 곡물을 모두 불태웠다.
■ 928년(敬順王 2) 8월, ……. 견훤이 조어곡(鳥於谷)에 병력을 주둔시켜 죽령로를 막았다. 11월 견훤은 병사를
뽑아 부곡성(缶谷城, 군위 부계)을 함락시켰다.
■ 929년(敬順王 3) 7월, 견훤이 병사 5천으로 의성부를 치니 성주인 홍술이 나아가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또 견훤이 순주(順州, 안동 풍산)를 치자 성주 원봉은 이를 막지 못하고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
12월, 견훤이 고창군(古昌郡, 지금의 안동)을 포위하자 고려 태조는 이를 구원하기 위하여 병사를 일으켜
예안진(禮安鎭)에 이르렀다.
■ 930년(敬順王 4) 1월, 재암성(載巖城, 청송 진보) 장군 선필(善弼)이 고려에 항복하므로 그를 후히 대접하고
상부(尙父)로 대우하였다. ……
1월 21일, 고려 태조는 친히 군대를 이끌고 고창군 병산(甁山, 안동 북쪽 10리)에 이르러 후백제와 결전을
벌였다. …… 태조는 이 전승에 공이 큰 고창성주 김선평(金宣平)을 대광(大匡)으로 삼고, 권행(權行)과 장길(張
吉)을 대상(大相)으로 삼았으며, 고창군은 높여 안동부라 하였다. 이에 영안(永安, 안동 풍산)․하곡(河曲,
안동 임하)․직명(直明, 안동 일직)․송생(松生, 청송읍) 등 부근의 30여 군현이 차례로 태조에게 항복
하였다. 2월 1일, 명주(溟州, 지금의 강릉)에서 흥례부(興禮府, 울산 부근)에 이르는 동해안 일대 110여 성이
모두 고려에 항복하였다.
■ 933년(敬順王 7) 5월, 고려의 정남장군(征南將軍) 유금필(庾黔弼)이 의성부를 수비하였다.
이에 신라는 오늘의 경주지방을 중심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였다가 대세가 고려에 기울고 있음을 깨닫고 935년에 스스로 고려에 항복하였고, 후백제에서도 견훤과 그 아들들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 국력이 약화되었으며, 드디어 936년 9월에 고려에 의해서 정복되었다. 이제 우리 한반도는 고려에 의해서 재통일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므로 오늘의 영양지방은 905년경에 후고구려의 궁예에게 점령되었다가 930년부터는 고려 태조(왕건)에게 투항하여 고려 영토가 되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통일신라 시대의 사상과 관련하여 영양지방에 대한 불교의 전래를 보면 지금 영양지방에 남아 있는 통일신라기의 불교 유적으로는 입암면 산해리(山海里)에 소재한 봉감 모전5층석탑(鳳甘模塼五層石塔, 국보 제 187호)과 영양읍 화천1리에 있는 화천리 3층석탑(化川里三層石塔, 보물 제609호), 영양읍 현l리 소재의 현리 3층석탑(縣里三層石塔, 보물 제610호)외에 일월면 용화2리에 있는 용화리 3층석탑(龍化里三層石塔, 지방유형문화재 제8호), 영양읍 현2리 모전5층석탑(模塼五層石塔, 지방유형문화재 제12호), 입암면 연당1리 소재의 연당석불좌상(蓮塘石佛坐像, 지방유형문화재 제111호), 영양읍 삼지리의 삼지모전 3층석탑(三池模塼三層石塔, 지방문화재자료 제83호) 등이 통일신라 시대의 작품이다. 이상에서 특별히 주목되는 바는 영양지방에 걸작의 모전탑이 세워져 있음인데, 우리나라에서는 8~9세기에 안동지방을 중심으로 4기에서 6기의 전탑이 조성되었다. 그러므로 오늘날 경북의 북부지방에서 많은 전탑이 남아 있음은 중국에서부터 비롯한 천불천탑을 염원하는 새로운 불교 신앙이 이 지방에서 유행한 결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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