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금석문전집Ⅱ 스크랩
贈吏曹參判 桃村 李秀亨 墓碑



贈吏曹參判 桃村 李秀亨 墓識

桃村先生 葬在順興治之東 黑石負艮之原 墓有石 前面書禦侮將軍忠佐衛副司正李某之墓 不書氏與行 蓋聞公享九十四春秋 有四子一女 子孫最爲蕃衍 間有學士文人 豈不能顯揚公哉 何故沒其行與跡 歷數百載 而無所徵歟 有志者 可以悲其意也 世傳 公二十一 棄平市署令 歸老于榮川之桃村 其歸 實在端廟遜位之年 公歸未二歲 而六臣者 死矣 其志微 其行隱 後之人 雖欲尋逐 而不可得 或言公實棄典牲署令 而石面只書軍職 歷官次第 又不可知 蓋公嘗並令典牲平市兩署 而後又付軍職歟 當禪受之際 士之有才者 無不攀附騰踔 以之弋奇勳 取高位 公之子孫 猶傳公與光廟善 公歸之後 上常令方伯致食物 而不屈致之云 方是時 左袒上王者 盡𩐎粉 矣 生者爲毁形廢疾 遐遯以絶蹤 公勳臣冑世 居京師 弱冠已筮仕 受五品服 人情孰不念舊土懷寵祿哉 乃一朝離鄕 去塚墓 捨知己主 棄軒冕如土芥 而投荒遐寂寞之中 忍窮餓 七十有餘年 足跡不一到京師 其心亦太苦矣 公婦翁金文節公淡 實與公同心 公之不之佗 而歸金公之鄕 有以也 子孫有得公與元觀瀾昊趙漁溪旅 同遊於雉嶽山中題名小帖子 其年在六臣就死之歲 而日月稍先之 及上王遜越 順興禍作之日 則又窅然莫之徵矣 其炳智先幾 高蹈以全身者 可知已 當是時 不義從仕 而高擧遐引 如觀瀾漁溪者 世稱六人焉 其跡俱隱 不可詳於今 而若公與文節 則其隱又甚矣 文節猶有數句詩可徵 而公則竟泯焉 其平生文與武 言與行 俱不能攷其萬一 然身愈隱而志益烈 名愈泯而節益不可及 只觀其弱冠棄官者何 七十餘年 不向京宅者何 上數使人存問 而不强致之者 又何也 以其時 想其心與事 可以得其人矣 公諱秀亨 字英甫 江陵之羽溪人 其七世祖球 十八中元朝制科 官至禮賓卿 高祖薿 佐我太祖 策開國勳 官中樞院副使都評議司事 曾祖蔓虎賁衛經歷 大父仁淑德川郡守 父景昌軍資監主簿 娶藝文館提學安玖女 以宣德乙卯生公 至嘉靖戊子爲九十四年 配宣城金氏 卽文節公之女 四子大根縣監 養根別坐 盛根監役 峻根參奉 一女孫伯暾 自孫曾以下 多不可勝載 先王朝端廟復位 當時死者 咸追復立祠 議者謂公之墓不可以終無識如前 公六世孫吾表兄直講徵道 謀諸同宗 思所以追刻石後而未果 今直講之弟弘道 年八十一 徒步詣光庭 泣語曰 莊園旣復 吾祖獨不可以無識 吾兄嘗有志不及 吾亦朝暮之人 若爲我銘吾祖 光庭固辭以非其人 而不可得 謹畧識其始終如是云 上之十四年戊午端陽日 莊寢郞 平原 李光庭 謹識
永嘉 權相翊 謹書

증이조참판 도촌 이수형 묘지(贈吏曹參判 桃村 李秀亨 墓識)

도촌(桃村) 선생의 묘소는 순흥부 동쪽 흑석리의 동북 간방(艮方)의 언덕에 있다. 묘전에 석물이 세워져 있는데 전면에 ‘어모장군(禦侮將軍) 충좌위(忠佐衛) 부사정(副司正) 이(李)모의 묘’라고만 새겨져 있고 씨(氏)와 행(行)은 쓰여 있지 않다. 대개 들으니 공은 94세까지 향수를 하였고 4남 1녀가 있어서 자손이 가장 많이 퍼졌는데 이따금 학사와 문인이 있었으나 어찌 공을 현양하지 못했으며, 어떤 이유로 공의 행적을 수백년을 지나도록 알 수 있는 기록을 남기지 못했는가. 뜻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슬프게 할 뿐이다.
세상에 전하기를 공은 21세에 평시서령을 버리고 영천 땅 도촌에 와서 평생을 지냈는데 도촌으로 올 때가 실로 단종이 양위하던 해이고, 공이 내려온 지 2년이 못되어 육신(六臣)이 처형되었다. 의중을 드러내지 않고 행적을 감추었으니 후세사람들이 비록 알고자 해도 성공하지 못했다. 혹자가 말하기를 공이 실은 전생서령(典牲署令)을 버리고 내려왔다고 하는데 비석에는 다만 군직만 쓰여 있으니 관직을 역임한 이력도 또한 알 수 없다.
대개 공이 일찍이 전생(典牲), 평시(平市), 양서(兩署)를 겸직하고 있다가 뒤에 군직에 있었던가. 단종과 세조가 왕위를 주고 받을 때를 당하여 선비로서 재주가 있는 자는 권세있는 자에게 빌붙어서 주살로 기이한 공을 세워 높은 직위를 얻지 않는 자가 없었는데, 공의 자손은 오히려 전하기를, “세조와는 사이가 좋아서 공이 낙향한 뒤에 왕은 항상 방백으로 하여금 공에게 음식을 보내게 하였으나 관직으로 공을 부르지 않았다.” 한다.
이때를 당하여 상왕 즉 단종편을 든 사람은 모조리 탈이 났고 생존한 사람은 얼굴에 상처를 내어 몹쓸 병에 걸린 것처럼 만들어 멀리 숨어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공은 훈신의 자손으로서 대대로 서울에서 살아왔고 20세에 이미 벼슬길에 나아가 5품직을 받았으니 인정으로서는 어느 누가 구토(舊土)와 국록(國祿)받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것인가. 하루 아침에 향토와 조상의 분묘와 자신을 알아주는 임금을 버리고 벼슬을 흙과 먼지처럼 팽개친 채 거칠고 먼 슬쓸한 산촌에 몸을 던져 70여 년을 어려운 생활을 참아가며 한번도 서울 땅을 밟지 않았으니 그 마음이 또한 크게 괴로왔을 것이다. 공의 장인인 김문절(金文節)공 담(淡)은 공과 같은 마음이었는데 공이 다른 데로 가지 않고 김공의 향리로 가까이 갔으니 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자손들이 공과 관란(觀瀾) 원호(元昊), 어계(漁溪) 조여(趙旅)와 함께 치악산 속에서 제명한 소첩자(小帖子)를 구하였으니 그것은 바로 육신이 처형당한 해인데 제명한 날짜가 조금 앞서 있었다. 상왕이 영월로 안치되고 순흥에서 금성대군이 화를 당한 날짜 또는 희미해서 확실하게 알 자료가 없으나 장차 일어날 환란을 예측하는 밝은 지혜로 멀리 떠나 일신을 보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때를 당하여 불의에 종사하지 않고 멀리 떠나 산야에 숨은 관란(觀瀾)과 어계(漁溪) 같은 이를 세상에서 생육신(生六臣)이라 칭하였는데, 그 행적이 한결같이 기록된 문헌이 없으므로 상세하게 알 길이 없으나 공과 문절공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음이 또한 심하다.
문절공은 그래도 두어 수의 시구를 찾아볼 수 있으나 공의 문장은 전혀 찾아볼 길이 없으니 평생동안 쌓은 문무와 언행을 그 만분의 일조차 상고할 수 없다. 그러나 일신은 숨어 살았으나 뜻은 더욱 열렬하였고 이름을 묻히었으나 절조는 더욱 따라갈 수 없었다. 다만 20세의 나이로 벼슬을 버린 이유가 무엇이고 70여 년을 서울의 옛 집을 찾지 않는 까닭이 무엇이며, 왕이 자주 사람을 시켜 안부를 물었으되 벼슬하기를 권하지 않았던 연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 시대의 상황으로서 공의 심사를 상상한다면 그의 사람됨을 알 수 있겠다. 공의 휘는 수형(秀亨)이요, 자(字)는 영보(英甫)로 강릉 우계인이다. 7세조 구(球)는 18세에 원나라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예빈경에 이르렀고 고조 억(薿)은 태조를 도와 개국훈에 책봉되어 벼슬이 중추원부사 도평의사사였으며 증조 만(蔓)은 호분위(虎賁衛) 경력(經歷)이요, 대부 인숙(仁淑)은 덕천군수요, 부 경창(景昌)은 군자감 주부 벼슬을 하였는데, 예문관 제학 안구(安玖)의 따님을 부인으로 맞이하여 선덕 을묘(1435)년에 공을 낳았고 가정 무자(1528)년에 공이 94세로 졸하였다.
배위는 선성 김씨(宣城金氏)인데 바로 문절공의 따님이다. 4남을 두었으니 대근(大根)은 현감이요, 양근(養根)은 별좌, 성근(盛根)은 감역, 준근(峻根)은 참봉이요, 1녀는 손백돈(孫伯暾)에게 시집갔다. 손자와 증손 이하는 많아서 다 기록할 수 없다.
선왕조에 단종이 복위되고 당시에 죽은 조신(朝臣)들도 모두 복직되어 사당을 지었는데, 공의 묘소에 전일과 같이 비명이 없음은 옳지 못하다는 공론이 있었다. 공의 16세손이고, 나의 외사촌 형인 직강 이징도(李徵道)가 여러 종인과 의논해서 비석 후면에 글을 새겨 넣을 계획을 세웠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지금 직강의 아우 홍도가 81세의 고령으로 나의 집까지 찾아와 간곡히 말하기를 “단종의 능원이 이미 복위되었으니 유독 저의 선조만 음기(陰記)가 없는 것은 옳지 못한 일입니다. 저의 형께서 일찍이 뜻이 있었으나 이루지 못했고 나도 역시 곧 지하로 들어갈 사람입니다. 저를 위하여 비명을 지어 주십시요.”라 하기에 내가 그 일을 맡을 제목이 못된다고 굳게 사양했으나, 하는 수 없이 수락하여 삼가 그 시종을 대강 기술한 것이 위와 같다.

영조 14년 무오(1738) 단오날 장침랑(莊寢郞) 평원(平原) 이광정(李光庭) 삼가 짓다.
영가(永嘉 : 安東) 권상익(權相翊) 삼가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