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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제비원이 미륵불의 사찰이라고 할 때, 우리나라 미륵신앙이 미륵경전에 나타난 초기의 미륵경전적 미륵신앙으로부터 후기의 토속 신앙적 미륵신앙으로 변모해 가는 과정에서 어느 위치에 있는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미륵신앙의 발생은 인도에서 대승불교가 일어나기 시작할 무렵인 대략 기원 전후시기로 보고 있다. 최초의 한역 미륵경전인 『미륵성불경』이 축법호(竺法護)에 의해 서기 300년경에 번역되었기 때문에 인도에서의 미륵신앙은 늦어도 서기 2세기 이전에 상당히 퍼져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현장의 『대당서역기』의 기록으로 볼 때 인도서북지역인 서역에도 성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의 미륵신앙도 아마 인도에서 직접 전파되었기보다 서역의 미륵신앙이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런데 이러한 미륵신앙은 대승불교 발생과 더불어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아함부경전』의 여러 곳에서 약간씩 이야기를 달리하면서 나타나 있는 것으로 보아 대승불교 발생 이전에 이미 미륵불 설화가 성립되어 상당히 유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이 기반이 되어 『미륵하생성불경』(구마라집 역), 『미륵대성불경』(구마라집 역), 『관미륵보살상생도솔천경』(저거경성 역), 『미륵래시경』(역자 불명), 『미륵하생경』(축법호 역), 『미륵하생성불경』(의정 역) 등 대승의 여러 미륵경전이 만들어졌다고 보인다. 이 중에서 앞의 세 경전이 소위 미륵삼부경이라 하여 중요시된다. 미륵불 설화를 바탕으로 미륵경전에 나타난 미륵신앙의 대강은 다음과 같다. 미륵(彌勒)은 범어로 Maitreya이고 뜻으로 한역하여 자씨(慈氏)라고 하는데 석가의 영특한 제자였다. 일설에 의하면 원래 미륵은 바라문교의 유명한 지도자인 바바리의 제자였으나 스승의 명으로 석가불에게 토론하러갔다가 석가불의 제자가 되었다고 한다. 미륵은 석가불에게 공자에게 있어 안회와 같은 존재였다고 한다. 그런데 한 때 석가불은 마하가섭 등 여러 제자들과 문답을 주고받던 중 미륵은 석가불로부터 내생에 부처가 되리라는 예언을 받았다. 불교의 세계관에 의하면 모든 생명체들은 육도를 윤회하며 고통 받는 삶을 계속한다고 한다. 이 윤회의 세계를 벗어나는 것이 진정한 생명의 본질을 발휘할 수 있는 해탈인데, 윤회를 거듭하는 가운데 해탈할 수 있는 유일한 출구는 인간이라는 생명체로 있을 때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윤회관에서 석가불은 자신은 지금의 생에서 해탈했지만 미륵은 이다음에 인간으로 태어났을 때 해탈하여 자신이 한 것보다 더 많은 중생을 구제할 수 있을 것이라 예언했던 것이다. 그래서 미륵은 석가와 같이 살았던 생을 일단 마감하고 육도의 세계 중 천계(천계의 단계 가운데 도솔천)에 머물면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날 때까지 보살로서 수행을 계속하고 그때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석가불의 생존 시부터 가장 가까운 미래인 56억 7천만년 후에 미륵은 석가불이 밟았던 코스와 같이 도솔천으로부터 인간의 몸을 통해 인간으로 태어나서 인간고를 벗어나기 위해 수행을 하고 용화수 아래에서 마침내 깨달음을 얻게 된다. 부처가 된 미륵불은 당시의 국왕인 상카왕과 그의 수많은 신하를 깨우치고 계두성이라는 성으로 들어가 교화하는 등 세 번의 설법을 통해 수 백 억의 인간을 구제한다. 다시 무리를 이끌고 마하가섭이 지하의 바위 속에 대기하고 있는 계족산으로 간다. 산에 오른 미륵불이 손가락으로 지시하자 바위가 갈라지고 그 속에 대기하고 있던 매우 조그마한 마하가섭이 석가불의 가사를 받들어 미륵불에게 바치고 공중에 날아올라 갖가지 기적을 보이다가 스스로 몸을 태워 마침내 입멸한다. 마하가섭이 매우 조그마한 인간이라는 것은 미륵불의 용화세계에서는 인간의 수명이 8만세이고 인간의 크기도 지금의 인간과 비교도 안될 만큼 크기 때문이다. 미륵불을 따라온 교만한 대중들은 마하가섭의 행동을 보고 감동하여 교만심을 버리고 깨닫는다. 이런 이유로 산 위에 그를 위해 탑을 세운다. 마하가섭이 위대한 까닭은 결국 석가불의 법을 이어주는 데 있다는 것이다. 미륵경전에 기록된 이와 같은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을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미륵불은 미래의 부처로서 언제가 이 땅으로 와서 인류를 구제한다는 데 대한 믿음이다. 석가불 당시에 그의 교화를 직접 받지 못한 대중들이 부처를 통해 구제받고자 하는 평범한 희망을 미륵불로 대치하여 매우 절실하게 표현하고 있는 신앙이라고 볼 수 있다. 해탈에 이르는 불교의 근본적 가르침은 사실 수행을 통해 자신의 힘으로 얻으라는 것이다. 그러나 평범한 대중들의 현실은 어려운 수행의 길보다는 자비력을 가진 부처의 구제력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들에게는 한마디로 수행보다는 부처에 대한 믿음이 해탈에 이르는 희망일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의지할 부처는 과거의 부처나 관념상의 부처가 아니라 현실에 구체적 인격으로 나타난 부처이어야 한다. 또 아미타불처럼 서방 극락정토에서 구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살고 있는 지금 여기의 현실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은 초월적 유토피아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유토피아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부처에 의해 다른 세계로 끌어가기보다는 그들이 사는 세계로 부처가 와주기를 더 절실히 원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미륵신앙은 초월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 개혁적 이상주의에 가깝다. 따라서 미륵신앙이 지배세력에게 이용될 때는 현실 개혁적 이상주의가 새로운 국가건설을 위한 국가통합의 이념이 될 수 있지만, 고통 받는 피지배계층에게 희망으로 선택될 때는 현실 개혁적 이상주의가 지배체제를 비판하고 저항할 수 있는 튼튼한 배경이 되기도 한다. 백제 무왕이 미륵사를 창건하여 백제를 재도약시키고자 한 것은 미륵신앙을 국가통합의 이념으로 활용한 전자의 경우라면, 내우외환에 핍박받던 위기마다 외세와 지배체제에 저항하던 많은 민란의 경우는 후자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둘째, 미륵신앙은 어느 불교사상보다도 불교의 이상적 목표인 부처와 보살의 관념이 강력하게 밀착되어 있는 특징이 있다. 대승불교의 이념은 타인을 구제하는 보살의 수행을 통해 부처가 된다는 것인데, 이러한 대승불교의 이념이 극단화되면 부처와 보살이 차별이 없게 된다. 말하자면, 부처가 부처다운 것은 깨달음을 향유하거나 윤회의 세계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중생의 세계에 있으면서 중생을 구제하는 일이고 그것이 바로 깨달음의 실천이라는 것이다. 지옥에 고통 받는 중생이 단 하나라도 있다면 그를 구제하기 전에 자신은 결코 열반에 들지 않겠다고 하는 지장보살의 서원은 보살을 부처수준으로 강조하는 대승불교 이념을 가장 잘 드러내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사실 불교적 이념일 뿐 현실에서는 보살과 부처의 틈이 엄연히 존재한다. 그러나 미륵신앙에서는 보살의 수행과 한없는 자비의 구제력을 뻗치는 부처가 미륵이라는 동일인에 의해 직접 연결되고 있다. 그래서 미륵은 보살이기도 하고 부처이기도 하다. 미륵보살은 현세로 돌아올 부처로 확실히 보장된 대기상태에 있는 최후의 보살이다. 말하자면 완성된 보살인 것이다. 미륵보살은 인간과 부처의 중간단계이며 인간이 부처로 건너가는 다리인 셈이다. 자기수행을 통해 인격적 완성을 이루고 완성된 인격이 현세에서 다시 타인을 구제한다는 미륵보살의 관념은 우리나라 초기의 미륵사상에 특별히 중요시되었다. 불교전래 초기에 조성된 불상이 대개 아미타불과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라는 점이 그렇고 신라 화랑의 이상을 미륵보살과 일치시키려고 한 것도 그러한 예이다. 어쨌든 미륵은 미륵보살이기도 하고 미륵불이기도 하므로 미륵신앙은 미륵보살에 관련된 미륵상생신앙과 미륵불에 관련된 미륵하생신앙이 있게 된다. 미륵하생신앙이란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 미륵불이 나타나 자기와 이 세상을 구제할 것을 믿는 신앙이고, 미륵상생신앙이란 자신의 생애동안 끝내 미륵불이 나타나지 않거나 그럴 가능성이 없을 때 미륵보살이 인간세로 내려와 미륵불이 되어 중생을 구제할 시기에 자신도 인간으로 태어나 구제받기를 기대하고 우선 미륵보살이 대기하고 있는 도솔천에 태어나기를 원하는 신앙이다. 혹자는 미륵보살에 대한 미륵상생신앙이 불교적 이상의 인격적 구현이라면, 미륵불에 대한 미륵하생신앙은 한 개체의 인격적 완성보다는 이상 세계의 완성에 무게를 두기 때문에 불교적 이상의 국토적 구현이라 말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미륵신앙은 전반적으로 볼 때 인격적 구현에 중점을 두는 미륵상생신앙에서 점차 국토적 구현에 중점을 두는 미륵하생신앙 쪽으로 옮아갔다고 할 수 있다. 셋째, 미륵불이 나타나는 미래의 불교적 이상세계를 불교에서는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다. 무엇보다도 인간의 수명과 신체규모가 지금의 상황과 비교해 볼 때 지나칠 정도로 확대되어 있다. 현재의 인간이 기껏 100세 정도인데 비해 그때의 인간수명은 8만 4천세이며, 현재의 인간 신장이 1.7m 정도인데 비해 미륵불시대의 인간은 신장은 약 3배인 16척 즉 5m나 된다. 미륵불시대의 인간에게는 음식의 필요와 대소변과 노쇠함의 3가지만 있고 그 외의 온갖 질병은 다 극복된다고 말하고 있으며, 마을과 시장도 닭이 날면 곧 닿을 정도로 연이어져 있다고 하였다. 한마디로 수명연장, 도시화, 질병극복, 편리한 문화시설, 규모의 거대화를 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미륵불의 용화세계는 객관적이고 현실적으로 묘사된 불교적 이상사회다. 다른 불교사상에 나타나는 이상사회가 고도의 불교적 명상 체험이 투사되어 환상적인 모습으로 그려지는 데 비해, 용화세계는 보통사람의 평범한 욕망이 비교적 객관적으로 그려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 미륵신앙과 그 표현양식도 이러한 미륵불의 용화세계를 드러내는 데 몇 가지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무엇보다도 미륵불의 크기가 거대하게 표현되고 있는 점이다. 대개 불상의 크기는 석가불이나 아미타불이나 비로자나불을 막론하고 인간의 크기를 기준으로 필요에 따라 약간 크거나 작게 만들어지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미륵불은 경전에 그려지고 있는 미래의 불교적 이상사회에 사는 장대한 규모의 인간처럼 거대하게 조성되는 것이다. 그것은 부처를 강조하기 위해 큰 것이라기보다 미래사회의 인간을 사실적으로 드러내는 크기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금산사ㆍ법주사ㆍ동화사의 미륵불이나 자연거석을 이용해 만든 미륵불이 거대한 것도 미륵경전에 나타나고 있는 이러한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다. 여기에 비해 아직 인간의 흔적을 가지면서 수행을 계속하고 있는 미륵보살은 반가사유상으로 알 수 있듯이 현실 인간의 크기를 표준으로 하고 있음은 좋은 대조가 된다. 또 미륵불은 불교적 이상을 인공적으로 조성한 법당 안에서부터 현실의 자연공간으로 나와 조성되고 있는 점도 유의해볼 일이다. 그것은 미륵불의 크기 때문에 법당이라는 협소한 공간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니다. 미륵하생신앙은 현실의 자연공간 그대로를 불교적 이상공간으로 구현하려고 하기 때문에 자연의 현실공간 그 자체가 법당이 된다. 뒤집어 생각하면 법당이 오히려 현실에 없거나 구현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인공적으로 조성한 공간이라고 여길 수 있다. 현실의 자연 자체가 불교적 이상공간의 무대로 설정하고 있는 미륵신앙이 이 땅에서의 삶에 강한 애착을 가지고 있는 우리의 전통 관념에 친근하게 다가오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넷째, 석가불의 정법을 미륵불이 올 때까지 지켜주고 미륵불에게 이어주는 마하가섭의 역할과 의미도 되새겨볼 만하다. 마하가섭은 석가불의 정법을 이어받는 학문적이고 수행적인 면에서 수제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후배인 미륵이 종교적인 차원에서 정법전수자임을 인정하고 그를 위해 기꺼이 헌신적인 역할을 맡고 나선 것이다. 마하가섭은 지하세계에서 미륵불이 오기까지 보살행을 닦으면서 정법을 보호하며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마하가섭이 미륵불과 얽힌 미륵신앙적 이야기 구도 속에는 땅이 갈라지고 가섭이 나타나 석가의 가사를 미륵불에게 전해준다는 정법전수의 상징이 있다. 그리고 도솔천으로부터 미륵이 하강하고 마하가섭이 지하로부터 용출하여 전법이 일어난다고 하는 것에서 ‘천계의 하강과 지옥의 용출이 화해적으로 조우’하는 또 다른 상징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상징구도가 가장 충실하게 반영되어 있는 곳이 안동 제비원 미륵불이다. 뒤에 좀 더 설명하기로 하고 지하에서 석가불의 정법을 수호하며 이 땅에 다시 유토피아가 건설될 때까지 이 땅을 버리지 않고 수행하는 마하가섭의 역할은 그 뒤 대승불교의 지장보살의 역할로 대치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왜냐하면 마하가섭은 석가불의 성문제자이지 대승의 보살제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고창 선운사 도솔산(천계의 상징)이 평지(현실세계로서 이 땅)와 맞닿는 절벽에 미륵불이 마애로 조성되어 있다. 이 사찰은 미륵신앙이 깊이 스며있는 곳이다. 그런데 이 사찰은 동시에 지장보살의 도량이기도 하다. 미륵불과 지장보살이 이렇게 어울리게 된 것은 마하가섭과 미륵불의 관계를 지장보살이 대신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이 사찰의 지장보살은 지하(지옥계)에만 거주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계에도 천상계에도 다 나타나고 있는 것도 마하가섭이 지하로부터의 용출하여 천상으로부터 하강한 미륵과 화해롭게 만나 각각의 자기 역할을 다한다는 미륵경전의 기본구도가 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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