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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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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성(鄭士誠)
, 1545년 ~
16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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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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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淸州) |
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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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명(子明) |
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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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헌(芝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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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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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安東) 마암리(馬巖里) |
출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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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安東) |
분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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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安東) |
입사경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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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8년(선조 1) 진사시(進士試) 합격 |
내관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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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자시봉사(內資寺奉事), 내첨시주부(內贍寺 主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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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관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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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구현감(楊口縣監), 태릉참봉(泰陵參奉), 집경전참봉(集慶殿參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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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마련해 준 서재 |
| 정사성이 17세 되던 해에 아버지 우윤공이 퇴계 이황의 문하에 들어가 배움에 매진하도록 한 후 도산에 작은 서재를 마련해 주었다. 스승인 퇴계는 그 서재에 동몽재(童蒙齋)라는 이름을 지어주면서 “너의 아버지가 너를 위해 서실을 지어주셨으니 배움을 추구하는 의지가 부지런하시다 할 만하다. 너는 모름지기 각고면려해서 아버지의 뜻을 저버리지 않도록 해라.”고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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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의 영정과 함께 한 피난길 |
임진왜란이 일어날 당시 정사성은 경주(慶州) 집경전의 참봉이었다. 경주가 함락되자 태조(太祖)의 영정을 받들어 서울을 향해 온갖 고생을 무릅쓰며 피란하였는데, 집 앞을 지나가면서도 들르지 않았다.
문집 중의 「도제천품보충청도감사장(到堤川稟報忠淸道監司狀)」은 당시 태조의 화상을 가지고 제천에 당도하여 충청관찰사에게 구원을 요청한 내용을 적은 것이다. 정사성은 제천에서 다시 안동으로 돌아와 임시로 예안의 백동서당에 태조의 화상을 봉안했다. 이 일과 관련되어 후일 조정에서 공로를 포상하는 과정에서 동료가 공을 독점하였으나 정사성은 끝내 스스로 자신의 공을 내세우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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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우 의병진에 참여함 |
53세 되던 해인 1597년(선조 30) 겸암 유운룡에게 편지를 보냈다. 당시 왜구가 다시 쳐들어왔으므로 편지를 보내 군기(軍器)와 의병 군량미를 점검하는 것에 관한 내용을 적어 보낸 것이다. 이어서 화왕산성 의병 본부에 가서 의병진에 참가했는데, 망우당 곽재우가 장수로 있었고, 당시의 이름난 인물들로 참여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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