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정영방(鄭榮邦) , 1577년 ~ 1650년
본관 : 동래(東萊)
: 응보(應輔)
: 석문(石門)
출생지 : 예천(醴泉) 우망리(憂忘里)
분묘지 : 안동(安東) 선어연(僊漁淵)
입사경로 : 1605년(선조 38) 진사시(進士試) 합격
소나무처럼 푸르른 절개와 허물없는 성품
조선 중기의 학자인 정영방(鄭榮邦)의 자는 응보(應輔), 호는 석문(石門), 본관은 동래(東萊)이다. 퇴계 학파인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의 문하에서 공부하였으며 학문과 시가 자못 출중한 인물이었다 한다.

1605년(선조 38)에 진사가 되었지만, 광해군의 어지러운 정치가 계속되고 스스로도 벼슬에 생각이 없어 낙향하여 진성(眞城) 임천동(臨川洞)에 머물 자리를 잡았다. 그 뒤 여생을 오로지 학문과 시(詩)로 소일했다 한다.
엄격한 자기검속
정영방은 젊어서 술을 가까이하였는데, 스승인 우복 정경세가 “선생이 경계하며 끊으라.”고 하자 이후로는 절대 입에 대지도 않았으며 평생토록 세속적인 즐거움을 따르지 않았다.
또한 향리에서 살아감에 있어 정성을 다하여 착한 일을 실행하였으며, 허물을 막아 단속하였다. 시비를 둘러싼 논란이 있을 경우 정영방이 시비를 가리면 번번이 사리에 맞았다. 또한 우복 정경세가 이조판서에 재직할 때에 정영방을 천거하려고 의사를 물었으나 사양하였다.
벼슬의 길을 버림
1605년 진사시에 합격했는데, 주위에서 모두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할 것을 권했지만 광해군의 정치에 실망하여 벼슬길에 나설 뜻을 버렸다.

벼슬에 관해서는 “세상 사람들이 과거를 통한 공명심을 추구하다가 본심을 잃게 되고 마침내는 본심을 회복할 길이 없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는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이익을 추구하는 마음에 유혹되었기 때문이다.”고 했다. 그래서 아들이나 조카 중에서 과거 공부를 하는 이가 있으면 비록 엄하게 금하지는 않았지만 좋아하지는 않았다.
자연 속 풍류의 삶
병자호란이 끝난 뒤에 어려서부터 좋아했던 연당동(蓮塘洞) 자양산 기슭에 터를 잡고, 식구 모두를 옮겨와 살았다. 집 서쪽의 시냇가에 작은 연못을 파서 서석지(瑞石池)라 이름하고, 이 연못을 마주하여 집을 짓고 각각 주일재(主一齋)와 운서헌(雲棲軒)으로 이름 붙였다.

한국 사대부가 3대 정원 중의 하나인 서석지는 자연 속의 소요를 통해 자연과 하나가 되려 한 그의 정신세계를 오롯이 반영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여기에서 유유자적하게 맑은 연못의 이끼 낀 바위 사이를 거닐다가 흥이 다하면 돌아오곤 했으며 학문을 닦고 제자를 양성하는 일에 치중하였다.

정영방의 손자가 1650년에 저술한 「임천산수기(林泉山水記)」의 내용을 보면 그가 얼마나 자연을 아끼고 사랑하였는가를 알 수가 있다. 그는 한평생을 자연 속에 살면서 학문 시를 짓다가 자연으로 돌아갔다.
읍취정을 세움
정영방은 만년에 기력이 쇠해지자 고향을 그리는 마음이 깊어져 선영이 있는 안동 송천으로 돌아와 선어대 아래에 띠집을 짓고 읍취정이라 이름 붙였다. 읍취정은 여러 차례 중수되다가 마침내 없어져 버렸는데, 1980년 송천파 주손인 정휘양의 주도로 중건되어 지금에 전해진다.
담담한 죽음
1650년 봄에 선영 아랫동네인 송천으로 돌아와 살았는데, 6월에 감기가 들어 7월 7일에 머리 감고 손톱 깎아줄 것을 명한 후 편안히 운명하였다. 이 때 나이가 74세였다. 안동부 동쪽에 있는 선어연(僊漁淵) 언덕에 장사지냈다.
권상일(權相一)이 쓴 묘갈명(1775년)
훌륭한 스승 만나려고 책 상자 지고 우산에 갔네.
우뚝한 기개 세상을 꺼렸어도 난리에 절개를 온전히 하였네.
석문의 맑은 절개 시절 따라 온 집안 산으로 들어갔네.
개연히 절개를 지키려는 뜻 끝내 고향으로 돌아와 마쳤네.
무성도하구나, 솔장원[松庄]의 푸르름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