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우탁(禹倬) , 1263년 ~ 1342년
본관 : 단양(丹陽)
: 천장(天章)
: 역동(易東)
시호 : 문희(文僖)
출생지 : 단양(丹陽) 현곡리(玄谷里)
출신지 : 단양(丹陽)
입사경로 : 1278년(충렬왕 4) 식년시(式年試) 장원 급제
내관직 : 영해사록(寧海司錄), 감찰규정(監察糾正), 성균좨주(成均祭酒)
관직 생활
1278년(충렬왕 4) 향공진사가 되고, 과거에 올라 영해사록이 되었다. 1308년(충선왕 즉위) 감찰규정이 되었고, 충선왕이 부왕의 후궁인 숙창원비와 통간하자 백의(白衣) 차림에 도끼를 들고 거적 자리를 짊어진 채 대궐로 들어가 극간을 하였다.곧 향리로 물러나 학문에 정진하였으나 충의를 가상히 여긴 충숙왕의 여러 번에 걸친 소명으로 다시 벼슬길에 나서서 성균좨주로 치사하였다.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는 예안(禮安)에 은거하면서 후진 교육에 전념하였다. 당시 원나라를 통하여 새로운 유학인 정주학(程朱學)이 수용되고 있었는데 이를 깊이 연구하여 후학들에게 전해주었다.
팔령신(八鈴神)을 물리침
우탁이 영해부사로 부임해 있을 때의 일이다. 영해지방에 파견된 지방관은 한두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 중에서 음사 타파에 힘쓴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우탁(禹倬)은 이렇게 하는 데 실제로 두드러진 행적을 남겼다.

고려 말의 신흥사대부가 신유학을 받아들이면서 유교 질서의 철저한 확립을 역사적인 사명으로 삼았음은 널리 알려진 바인데, 우탁은 그 중에서도 강경파였던 것 같다.

우탁은 영해 사록으로 부임했다. 사록은 오늘날의 검찰 업무에 해당하는 일을 맡았으니 음사 타파가 자기의 소관이다. 우탁은 과거에 급제하고 처음에 영해 사록이 되었는데, 군에 요사스러운 사당이 있어 팔령이라고 하며, 백성이 괴이한 귀신에 미혹되어 제사를 아주 난잡하게 만들었다. 우탁이 그곳에 이르러서 즉시 이것을 부셔서 바다에 빠뜨리니, 음사가 드디어 끊어졌다고 한다.
도끼를 들고 대궐에 들어간 우탁
충렬왕이 승하하자, 원나라에 있다가 돌아와 왕위에 오른 충선왕은 빈전(殯殿)에 제사를 행하고, 그 부왕(父王)의 후비인 숙창원비(淑昌元妃)가 거처하는 그 친정으로 가서 숙창원비를 간음했다.
충선왕은 숙비의 교태에 빠져, 국정을 돌보지 않고, 팔관회(八關會)도 멈추게 했으며, 숙비는 왕의 총애를 믿고, 그 방자하고 사치함이 이를데 없어 벼슬아치들이 다투어 뇌물을 바쳐 그 환심을 사기에 급급한 판이었다.

왕의 불륜과 숙비의 방자함에 뜻있는 선비들이 모두 분격했고, 백성들도 못 마땅히 여겼으나, 그 무렵 조정에는 나약하고 아첨하는 무리가 가득하여, 감히 바로 간(諫)하는 신하가 없었다. 이에 우탁이 분연히 도끼를 가지고 거적 자리를 메고 대궐에 나가 왕의 비행을 직간하는 과감한 소를 올렸다.

가까이 모신 신하가 그 상소를 펴들고 겁에 질려, 차마 임금 앞에서 읽지를 못하여, 우탁이 소리를 가다듬어,“그대는 근신(近臣)이 되어 임금의 잘못을 바로 잡지 못하고, 그 허물이 이에 이르렀으니, 그대의 죄를 아는가.”라고 꾸짖으니, 신하들이 모두 떨고, 왕도 부끄러워하는 기색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