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이수형(李秀亨) , 1435년(세종 17)년 ~ 1528년(중종 23)년
본관 : 우계(羽溪)
: 영보(英甫)
: 도촌(桃村)
분묘지 : 순흥 흑석리(黑石里)
입사경로 : 음사(蔭仕)
내관직 : 통훈대부(通訓大夫) 평시서령(平市署令)
증직및기타 : 좌승지(左承旨), 이조 참판(吏曹參判)
단종에 대한 충절로 생애를 일관하다

21세 되던 해 평시서령(平市署令)이라는 직위에 있을 때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벼슬을 사직하고 생육신의 일원들인 관란(觀瀾) 원호(元昊)·어계(漁溪) 조려(趙旅)와 함께 단종을 향한 충절의 징표로 원주 치악산에 있는 바위에 각자의 이름을 새기고는 순흥 도지리(道知里 : 현 봉화읍 도촌리)로 이주하여 은거하였다. 대대로 한양에 살던 이수형이 도지리에 은거지를 마련한 것은 이곳이 장인의 고향이었기 때문이다.
치악산의 바위에 새겨진 제명록(題名錄)의 내용은 관란 원호·어계 조려·도촌 이수형 순으로 이름이 차례로 쓰여 있고 말미에 “경태(景泰) 병자년 3월 보름 치악산에서 돌에 새겨 세운다.”고 되어 있다. ‘경태 병자년 3월’이라는 시점은 1455년(세조 1)으로, 단종이 영월로 유배되기 직전에 해당한다.
이수형은 세조가 대군의 신분으로 있을 때부터 개인적으로 친한 사이였다. 이런 까닭에 왕위를 찬탈 후에도 세조는 인근의 관원을 시켜 음식을 정기적으로 보내 우대하곤 하였으나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는 21세에 은거하여 94세로 죽을 때까지 70여 년 동안 집이 있는 한양 땅을 한 번도 밟지 않았다.
장릉(莊陵)의 방향인 북향으로 집을 짓다

단종에 대한 이수형의 충절은 그가 지은 집의 구조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은거지인 도지리의 지세를 고려할 때 동남향으로 방향을 잡는 것이 마땅함에도 이수형은 북향으로 집을 지었다. 그리고 집의 동편에 한가하게 지낼 장소를 마련하였는데, 1칸짜리 방이 남쪽에 위치하고, 그 2배 크기의 마루는 북쪽에 자리 잡은 구조였다. 또 방의 동남쪽 벽은 2개의 엇창살만을 만들어 채광만 가능하고 사람 통행은 불가능하도록 하였고, 북쪽 벽은 종이로 앞에 놓인 마루를 가리게 하고 중간에 문을 만들어 사람이 출입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마루 또한 동서는 모두 벽으로 둘러막았다. 따라서 방에서는 오직 북쪽의 먼 산만을 볼 수 있었으니, 이는 단종릉인 장릉이 있는 영월 방향을 항상 바라보고자 하는 일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후에 충재(冲齋) 권벌(權橃)의 6대손인 창설공(蒼雪公) 권두경(權斗經)이 이곳을 들렀다가 이수형의 그런 충절에 감읍하고는, 단종을 향한 일편단심의 높고 깊음을 기려 방을 천인실(千仞室)이라 하고, 마루는 두 손을 잡고 평생토록 단종을 경모했다는 뜻에서 공북헌(拱北軒)이라고 명명하였다.
괴화나무도 감동시킨 충절

낙향한 뒤 뒤뜰에 괴화나무 1그루를 심은 적이 있는데, 이수형이 죽은 다음해 이 나무도 말라죽었다. 그런데 130여 년 뒤 단종이 복위된 다음해부터 다시 살아나 잎이 돋고 꽃이 피었다고 전한다. 이는 단종복위운동을 펼치다 처형된 세조의 동생 금성대군(錦城大君)의 넋이 서려 있는 순흥 땅 금성단(錦城壇)의 은행나무 전설과 유사한 것으로, 이수형의 충절의 정도를 잘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