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남상규(南相奎)
본관 : 영양(英陽)
: 덕노(德老)
: 우산(愚山)
출생지 : 근남면 노음리 오로마을
남북으로 다니며 삼남의 거유들을 만나다
남상규는 1856년(철종 7)에 근남면 노음리 오로마을의 자택에서 태어났다. 그의 자는 덕노(德老)이며 호는 우산(愚山)이다. 타고난 용모가 엄수 단정하고 기개와 도량이 맑고 준수하여 엄연히 장부의 도량과 재간이 있었으며 타고난 성품이 어려서부터 청렴 강직한 기질을 보였다. 학인들은 그의 어렸을 적부터 의연한 모습을 ‘5~6세 때 바닷가 해녀가 생선을 팔려고 집에 왔는데 값을 지급하는 것을 보기 전에는 어른들이 먹으라고 하여도 먹으려고 하지 않았다.’라고 묘사했다.
부친인 남윤석(南胤奭)이 생계가 몹시 곤란하였으나, 교육열이 높아 독선생을 모시고 서적을 널리 사들이고 함께 공부할 학생들을 많이 불러왔다. 긴 밤 내내 글을 읽으면 그 피로함을 살펴 간식을 먹이곤 하였으며 혹은 산실로 보내어 공부하게 하고 여름이면 남북으로 다니면서 공부를 하게 하니 가까운 지역의 노숙한 선비와 삼남의 거유들을 많이 만났다. 향내의 백일장에서 도맡아 장원을 했다.
남상규가 학업을 성취한 것은 부친이 지성으로 인도하여 도와 준 공이다.
과거시험의 부정과 문란으로 응시를 포기하다
35세 되던 1891년(고종 28)에 부친의 권유에 따라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당시의 과거는 부정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조정의 기강이 문란하여 나라가 멀지 않아 망할 징조가 보이는지라, 같이 갔던 장공 만초에게 가로되 “국세가 이미 기울어졌으니, 선비가 마땅히 벼슬할 때가 아니다.”하면서 당일로 여장을 챙겨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종황제의 책문에 응제했으나, 권문세가의 훼방으로 탈락하다
경자(庚子)년 봄 국포(菊圃) 권계화(權啓和)가 바닷가에 유람 와서 수 년 동안 즐기면서 남상규와 더불어 시로써 뜻을 말하고 글로써 도를 강론하였다. 1902년(광무 6) 봄에 고종이 경의(經義)에 대한 책문(茦文)을 내렸는데, 권계화가 남상규에게 응해보기를 권유하여 관선을 임기까지 하였으나, 과장에 임하여 재기를 치름에 미쳐서는 권문세가들의 청탁에 밀침을 당하여 채택되지 못했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공론이 그를 매우 애석하게 여겼다. 몇 해 후에 몽사(여기서는 고산서원을 뜻함)에서 의논하여 그 일을 감영에 직소하려 하자, 남사규가 안된다고 하면서 “지금이 과연 어떠한 때인가. 선비로서 의리를 알면 마땅히 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바치기에 겨를 없어야 하거늘 사소한 향중의 일을 가지고 방백에게 요구하는 것은 의를 어지럽힐 뿐만 아니라 도리어 욕을 끼치는 일이 된다.”하고 마침내 따르지 않았다.
권계화(1838~1917)는 본관이 안동이며, 고종 때 홍문관박사를 지냈다. 박학경문(博學經文)하여 글씨와 글이 물 흐르듯 하여 영남 제일이었다. 수직으로 통정대부에 올랐고 문집 4권이 있다.
영남만인소의 주역인 향산 이만도가 남상규를 극찬하다
남상규는 성균박사 윤규병(尹奎炳)과 정분이 두터웠다. 매년 봄 여름 계절이 바뀔 때마다 더불어 조계와 주천대 사이를 한가로이 거닐면서 술을 마시고 시를 읊으며 강론을 즐겼다. 이 무렵에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가 남상규를 한번 만나보고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동해 가에 유람한 이후로 좋은 강산과 좋은 주인을 만나 보았다.”라며 남상규의 인품과 학행을 극찬했다.
남상규는 지조와 행의가 더욱 견고하여 남이 알아주기를 구하지 않았으며, 당시의 풍교(風敎)가 날로 해이해지고 문란해지는 것을 개탄하며, 제자들을 모아 반드시 서로 읍하는 예절을 뜰 안에서 거행한 뒤 강학했다.
향산 이만도는 진성이씨로, 1866년 문과에 급제한 뒤 사간원 집의로 있을 때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에 반대했던 최익현을 두둔하다 파직된 인물이다. 또 1881년 정부의 개화정책에 반대하여 영남의 유생들이 「영남만인소」를 올리는데, 이 일로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백동서당을 열고 후학양성에 나선 선비이다.
면암 최익현의 순절에 제문을 지어 조문하다
융희 원년에 성균관 직원으로 천거 받고 수락하고 당시 관아의 재정관이 문묘의 재산을 숨기자 이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이루지 못하자 사직원을 세 번이나 내고서야 면직하였다.
남상규는 일찍이 면암 최익현과 서찰을 주고받으며 국운을 토론하고 경학을 논했다. 최익현이 위정척사를 굳게 지켜 마침내 대마도에서 순절하자 남상규는 제문을 지어 조문하였다.
단계 남건과 도의로 교유하여 황화시첩과 논변한 여러 가지 글들이 전한다.
공의 문인들이 경산계를 모아 학맥을 잇다
항상 불초에게 이르시기를 ‘사람의 도리는 모름지기 먼저 가정에서는 도리를 극진히 하려고 힘써야 하고, 현달하여서는 임금과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치고 충성을 다할 따름이니, 향읍 등의 일은 선비가 마땅히 할 바가 아니다.’하시고 또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가정에 적서(嫡庶)의 분별을 너무 분명하게 하려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니 너희는 경계하라.’하였다.
1929년 2월 3일에 향년 74세로 돌아가시니 그를 따르는 문인들이 고인의 덕을 추모하여 학계를 모으니 경산계가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