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남진영(南軫永) , 1889년 ~ 1972년
본관 : 영양(英陽)
: 정함(靜涵)
: 무실재(務實齋)
출생지 : 경북 울진군 울진읍 정림1리
출신지 : 울진군
분묘지 : 울진군 울진읍 정림1리 비봉산
울진의 마지막 유학자
남진영(南軫永)은 자가 정함(靜涵)이고 호가 무실재(務實齋)다. 1889년(고종 26) 울진읍 정림1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구한말 격변기에 태어나 일제강점기라는 어려운 시대를 살았으며, 좌우익으로 갈라진 조국 강토에서 학문하는 선비의 전형으로 살다간 사람이었다. 그의 삶은 한국 근세사의 격변기를 모두 겪으며, 이 땅의 마지막 유가(儒家)의 맥을 잇는다. 그가 살았던 한말의 역사적 위기에 대응하는 지식인들은 유교 이념의 전통을 고수하는 입장과 신문물의 도입을 주장하는 입장으로 갈라진다. 유교 이념을 지키는 이들은 의병활동 전개 등 적극적 항일 독립투쟁파와 은둔하며 도학(道學) 전통파로 나눌 수 있다. 구한말 최대 유림을 형성했던 전우(田愚)는 후자에 해당한다. 전우는 19세기 외세의 침략과 국권상실의 시대상황에서 도학 계승을 자신의 책무로 생각했던 인물이다. 전우는 심성론(心性論)에서 악(惡)으로 흐를 위험성이 있는 인간의 마음은 항상 순선(純善)한 도덕 본성을 배워야 한다는 ‘성사심제(性師心弟)’를 주장하였다.
남진영은 일제 강점 후 계화도와 왕등도로 거처를 옮겨갔던 스승 전우를 따라 철저하게 도학에 천착하였다. 그의 이러한 노력으로 주자 성리학의 학문적 성과를 상당 부분 이룩하고 스승으로부터 ‘무실재(務實齋)’란 호를 받는다. 고향에서 동학들과 강학소를 열어 후학을 가르치며 덕을 갖춘 선비로 살아가자 지역의 대학자로 추앙받는다. 그는 어려서부터 성실하고 영민하여 열심히 공부하고 특히 부친이 필사한 󰡔주서백선(朱書百選)󰡕을 상자에 간직하며 즐겨 읽었다고 한다. 또한 주자의 초상을 책 속에 두고 공경하며 주자를 닮고자 하였다.
강직함과 내공을 갖춘 선비
남진영이 53세 되던 해 단발령이 내려졌다. 상투를 한 그를 연행하러 온 단속반 일행과 다투는 중 귀가 먼 노모는 영문도 모르고 “내 아들이거든 저 순사를 따라 가거라.”하자 남진영은 모친의 뜻에 따라 순순히 단속반을 따라갔다. 그러다 고성2리(가원동) 앞 주막에 이르자 남진영은 “내가 모친 때문에 여기까지 오긴 했으나 죽어도 더 갈 수는 없다”고 하며 식음을 전폐하고 3일간 버틴 결과 방면되었다.
또 1945년 어느 봄날 호월1리 장영균과 고성2리(가원동) 앞 송림 속을 거닐다가 소나무에 송진 채취용 깡통이 매달려 있는 것을 보고 “저것은 필시 왜적 놈들이 한 짓인데, 대자연의 섭리를 무시한대서야 천도(天道)가 무심치 않을 것이다. 일본은 곧 패망할 것이다!”라고 했다.
남진영이 살던 시기는 서구 열강들의 외침으로 국가 존망이 위태롭고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온 유교 전통도 붕괴되어가던 시기였다. 이러한 때 한말의 도학자(道學者)들은 의리정신에 입각한 위정척사(衛正斥邪) 사상으로 외세의 침략과 국권상실의 시대에 대항하고자 했다. 그 대표적 인물이 전우와 남진영이다. 남진영은 전우의 적전(嫡傳) 제자로 조선의 마지막 유학자요 이 땅의 선비였다. 1972년 83세를 일기로 조선의 마지막 선비는 생을 마감한다.

그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시가 있다.

의발을 지키기 위해 자재(自裁)할 기구를 지니고 다녀 絞繩謀髮日相隨
손을 잡고 장하다 말을 하면서도 분하여 눈물이 쏟아지네 握手談悰憤悌洏
삼천리에 사나이는 없고 수염 달린 부녀자뿐인데 千里無人髥婦國
젊은 나이에 기특한 지조가 그대 같은 사람 드무네 妙年奇操似君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