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손순효(孫舜孝) , 1427년 ~ 1497년
본관 : 평해(平海)
: 경보(敬甫)
: 물재, 칠휴거사(勿齋, 七休居士)
시호 : 문정(文貞)
출생지 : 충주시 산척면 원월리
6세 때 소학을 읽고, 24세 때 사마시에 합격하다
손순효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지혜에 밝아 5~6세에 능히 『소학』을 이해하였고 성장하면서 성리학에 뜻을 두어 언행거지가 예의에 벗어남이 없었다. 그래서 동년배들이 그를 매우 경애하였다. 24세 되던 1451년(문종 1)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453년(단종 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457년(세조 3)에는 문과중시에 정과로 급제하였다.
17개 항목의 정책을 건의하여 정치를 개혁하다
44세가 되던 1471년(성종 2)에 전한(典翰)∙집의(執義)가 되어 17개 항목의 정책을 상소하여 채택되면서 형조참의로 특진되었다. 그러나 직무의 처리가 잘못되었다 하여 상호군(上護軍)으로 좌천되자, 사퇴하여 남산 밑에 초정(草亭)을 짓고 후학을 가르쳤다.
술을 좋아한 청백리, 임금을 감복시키다
손순효는 술을 좋아하여 과음하는 일이 많았다. 성종이 유독 그를 아꼈으나 과음하는 일이 마음에 걸렸다. 성종이 그의 버릇을 고치기 위해 은세공업자에게 명하여 매우 작은 술잔을 만들어 손순효에게 건네며, “이 잔으로 하루에 한 잔씩만 마시라.”고 명했다. 손순효는 하사품으로 받은 은잔을 보니 잔이 작아도 너무 작았다. 그러나 임금의 지엄한 명이라 거역할 수 없어 매일 그 잔에 한 잔씩만 술을 부어 마시게 되었다.
손순효가 더는 과음을 하지 않는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성종은 매우 흐뭇해하였다. 하루는 손순효가 집으로 돌아와 은잔에 술을 가득 채워 아껴가며 마시자니 이름난 애주가였던 그였던지라 도저히 참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마침내 그는 은세공업자를 불러서 은잔을 종이처럼 얇게 두드려 잔을 넓혀 달라고 당부했다. 은세공업자가 뚫어질 정도로 은을 얇게 두드려 잔을 키워서 한 되가 넘은 술을 채울 수 있게 되었다. 순순효는 매우 기뻐하며 독한 술을 은잔에 가득 채워 마시며 다시 고주망태가 되었다. 성종이 그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여 “그토록 경계하였거늘 어찌 이리도 취했는가! 이렇게 취해서야 자문(咨文)을 지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니 손순효는 “신은 전하의 명을 받들어 하사하신 은잔으로 하루에 한 잔을 마셨을 뿐이옵니다. 제가 자문을 지을 수 있으니 맡겨 주십시오.” 성종은 의심이 갔으나 잠자코 붓과 벼루를 내주어 글을 짓게 하였다. 손순효는 순식간에 글을 지어 올렸는데 글자의 획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으며 문장도 명문이었다.
성종이 감탄하여 말하기를 “경은 취한 정신이 깬 정신보다 나은가 보구려! 어째서 짐과의 약조를 어겼는고?” 이에 손순효가 은잔이 너무 작아 넓힌 것을 말하니 성종은 웃으며 “앞으로 나의 소견도 경이 간언하여 은잔처럼 넓게 해주시오.”라고 말하였다고 전한다.
그 뒤 장예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가 되어 소송 문제를 신속하고 정확하게 처리하였으며, 1475년 부제학을 거쳐 동부승지·우부승지·좌승지를 지내고, 1478년 도승지가 되었다. 이어 강원도관찰사로 나아가 선정을 베풀고, 호조참판·형조참판을 지내면서 왕비 윤씨(尹氏)의 폐위를 반대하였다. 1480년 지중추부사로 정조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공조판서·경기도관찰사·대사헌·한성부판윤·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임사홍을 탄핵하다가 좌천되다
1485년 임사홍(任士洪)을 두둔하다 왕의 미움을 사서 경상도관찰사로 좌천되었다. 다시 좌찬성으로 들어가 판중추부사가 되었으나, 병으로 사임을 청했으나 왕이 윤허치 않고 비답(批答)과 궤장(几杖)을 하사하시니, 그의 나이 69세였다.
임금으로부터 궤장을 하사받은 이듬해인 1497년(연산군 3) 3월 23일에 71세로 돌아가시니 문정이라는 시호가 내리셨다. 벼슬은 숭정대부 의정부우찬성 겸 세자이사, 동지 춘추관사, 판의금부사, 오위도총부총관을 역임했다.
충(忠)과 서(恕)로 정치를 펴고 성리의 근원을 파헤쳐 학문하다
선생은 타고난 자질이 영매하고 금도가 쇠락하여 일을 처리함에 자상하고 분명하며 일을 논하고 건의함에는 충과 서를 위주로 하였고 사물을 접할 때는 화애로운 기운이 넉넉하면서도 늠름하여 감히 범하지 못하는 기상이 있었다.
학문을 하는 데는 성리의 근원을 탐구하는 데 중점을 두고 특히 『중용』과 『대학』, 『주역』에 정통하였으며, 문장을 짓는 데는 붓을 들면 흐르는 물처럼 유창하게 써내려갔다.
높은 벼슬에 올라 귀하여져서도 염허하고 청한(淸閑)함이 재야 시와 다름이 없으니 당시 사람들이 선풍도골(仙風道骨)이라고 칭찬하였다.
문집이 있고 평해 운암서원에 배향되었으며 증원군 산척면 송강리 행정마을에 묘가 있으니 극암 이창신이 지은 신도비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