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윤시형(尹時衡) , 1602년 ~ 1663년
본관 : 파평(坡平)
: 평중(平仲)
: 우암(憂菴)
출생지 : 울진군 원남면 매화
출신지 : 울진군
분묘지 : 울진군 근남면 수곡리
울진 유학 발흥의 중심에 서다
윤시형은 부친 매오(梅塢) 윤몽열(尹夢說)과 고모부인 이우당(二友堂) 주개신(朱介臣)이 집 근처에 몽천서당을 열어 후학을 가르치던 시점에 태어났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본인 스스로 어릴 때부터 독실하게 학문에 몰입하여 자연히 그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16세 때 지은 「봉왕부(蜂王賦)」는 당시 고을 선비들을 놀라게 하였고, 백일장에 여러 번 장원하여 동료 선비들 간에 명망이 높았다. 20대에는 만휴(萬休) 임유후(任有後), 주개신의 아들 주형(朱炯), 전선(田銑) 등과 수친계(壽親契)를 맺고 학문적 교유를 나누면서 막역한 벗이 되었다. 그 후 잠시 처가인 영양에 머물 때에는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 존재(存齋) 이휘일(李徽逸), 표은(瓢隱) 김시온(金是榲) 등과 사귀면서 그 명성이 영동·영서 지방에 널리 알려졌다. 1647년 사마시에 급제하여 생원이 되어 성균관에서 수학할 때 「강심경부(江心鏡賦)」를 지어 장원함으로써 성균관장의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대과급제의 꿈은 이루지 못하고 낙향한다. 행동이 법도를 어김이 없어 모든 유생의 존경을 받았으며, 성품이 온후하고 학문과 덕행을 겸비한 학자로서 지역에서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그의 학문은 아들 삼족당(三足堂) 윤여룡(尹如龍), 증손 황림(篁林) 윤사진(尹思進), 윤사적(尹思迪)으로 이어지게 된다. 실로 지역 유학발흥의 중심축의 한 사람이었다. 그가 죽자 원근의 많은 유림 선비의 만사를 지어 보냈고 절친했던 임만휴는 묘지명을 지어 보냈다.
만언소(萬言疏)를 상소(上疏)하여 효종(孝宗)의 비답(批答)을 받다
1656년(효종 7) 삼남 지방에서 8년 간의 긴 가뭄으로 흉년이 계속되자 효종은 민간 선비들에게 정치에 대한 의견을 구하는 교서를 내렸다. 이에 윤시형은 백성의 고통을 조목조목 지적하여 정책 대안을 작성하여 올렸다. 효종은 비지(批旨)를 통해 “상소문을 다 살펴보았다. 초야의 한빈한 유생으로서 임금 사랑, 나라 걱정하는 지극한 정성은 보통 백성보다 배나 크도다. 천 리의 먼 곳에서 상소문을 올려 시국의 폐습 천백 가지를 극언으로 소상히 말하니 이는 북받치는 충성심에서 나오지 않음이 없음이라. 가상하고 기뻐서 특별히 두세 번 깊이 보고 또 보았노라. 가히 깊이 생각하지 못했던 병폐들이다. 마땅히 묘당에서 의논하여 조치토록 하겠노라.”고 하였다. 효종은 비지를 내리는 동시에 그 상소문을 출판하고 팔도에 배포하여 널리 알렸다. 그 후 효종의 답비지는 삼조어비각(三朝御批閣)에 보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