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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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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발(李英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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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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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의(全義) |
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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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沙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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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가에서 태어나 영동과 영서의 시회를 휩쓸다 |
이영발은 1603년(선조 36)에 사동리 본가에서 태어났다. 이영발의 가계는 조선 중기 이후 대를 이어 당상관 벼슬을 한 명문가였다. 특히 그의 9대조인 이탁간(李卓幹)의 둘째 아들 이사관(李士寬) 대에 와서 전의이씨 가문은 조선조의 명문반열에 뛰어오르며 전성기를 맞는다. 이사관은 고려 우왕 때 태어나서 한성판윤을 거쳐 영의정에 추증된다. 그는 7남 2녀를 두었는데, 그 중 2남인 이지장(李智長)의 아들 이덕량(李德良)이 세조·예종·성종 대에 걸쳐 무관으로 급제하여 하동현감을 지냈다. 황보인과 단종복위를 꾀하다 이루지 못하고 여주에 은거한다.
3남인 이예장(李禮長)은 1432년에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참의를 지냈다. 이수관의 5남인 이성장(李誠長)의 아들 이수남(李壽南)은 17세에 진사시, 20세 때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대사헌과 황해도관찰사를 역임했다.
전의이씨 문중에서 유일하게 배출된 대제학 이덕수(李德壽)도 이탁간의 현손이며, 당대의 뛰어난 명필가인 이제신(李濟臣)은 이탁간의 6세손이다.
문의공파(文義公派)에서는 그의 증손인 이귀(李龜)의 자손이 크게 번창하였는데, 영의정을 지낸 이탁(李鐸)과 우의정 이상진(李尙眞)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명문가의 긍지를 갖고 태어난 이영발은 어려서부터 영민하여, 영동과 영서의 시회에 참가하여 여러 번 장원을 차지하는 등 글재주를 발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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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효전가’의 가훈을 실천하다 |
그러나 그는 과거 급제에는 그다지 집착하지 않은 듯하다. 그의 묘갈명을 쓴 생원 남대만은 그의 이런 성격을 “일찍이 영서의 향내에 가서 일거에 장원을 하였는데, 곧바로 후회하기를 ‘관동이 험한 지형은 중국 촉도(蜀道)의 구절양장보다 더 심하거늘 어떻게 부모의 유체를 조심하라는 옛사람들의 경고를 잊을 수가 있겠는가.’하면서 과거의 뜻을 버리고 사동에 집을 짓고 사계정사라 현판했다.”고 기술했다.
이영발의 품성은 외가와 본가를 모두 닮아 학문의 성취에 앞서 더 소중하게 여긴 것은 ‘충효(忠孝)의 실천’이었다. 이영발의 이 같은 품성은 이정간이 효행으로 세종대왕의 친필을 받은 이래, 전 가문의 가훈으로 내려온 ‘충효전가’의 전통과 그의 외조부로부터 전가된 어머니의 자세에서 비롯된 것으로 짐작된다.
묘갈명을 쓴 남대년은 이영발의 자세를 “평생의 목표는 충효 두 자이다.”라고 평했다.
이영발은 해월 황여일의 아들인 동명 황중윤, 이우당 주개신, 애월당 남유주와 교유하며 사계당에서 후학 양성에 힘을 쏟는다. 특히 이영발은 사제(師弟)와 혼인관계를 바탕으로 평해 지방과 울진지방의 학문적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데 중심역할을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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