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장백손(張伯孫)
본관 : 울진(蔚珍)
입사경로 : 1487년(성종 18) 호방시(虎榜試) 병과(丙科) 급제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여 장군의 기상을 타고나다
장백손은 본관이 울진으로 찰방 장천말(張天末)의 손자이다. 태어나고 죽은 해가 분명하지 않다. 장백손은 세종 때) 울진면 후정리 매정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체격이 장대하고 성품이 용감하였다. 어려서부터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었으며, 경서와 사기의 이치에 깊이 파묻혔다. 또 말타기와 활쏘기를 익혔다.
장백손은 1471년(성종 2)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당시 평안도 병마사, 함경도 절제사 등을 역임한 명장 허종의 휘하에서 근무했다. 장백손은 사마시에 합격한 뒤, ‘지금은 조정과 지방이 분발하고 백공(百工)이 노력하여 새로운 국가의 기틀을 세워야 할 터인데 스스로 구차하게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인 계책으로 산다면 이것은 나라의 수치’라며 다시 과거공부에 매진했다.
또 장백손은 무인의 길을 결심하고, 존경하는 벗 허상국(許相國)을 찾아가 ‘겉으로는 무(武)를 안으로는 문(文)을 닦아서 변용의 도리를 터득하겠다.’고 하였다. 1487년(성종 18)에 무과에 급제하여 내금위를 제수하고 무인의 길로 들어섰다.
성종 조에 여진족을 정벌하다
3년 뒤인 1490년(성종 21)에 함경도 갑산진 병마만호가 되었는데, 이 무렵에 여진족이 조산보에 쳐들어와 그곳 수장을 죽이고 그 땅을 점령하는 변란이 발생했다. 조정에서 여진족 정벌을 결의하고, 허종을 도원수로 임명하고 장백손을 영안감사로 임명하여 여진족을 토벌할 것을 명했다. 그해 10월에 장백손은 도원수인 허종과 함께 두만강을 건너 700리를 쳐들어가 여진족을 정벌했다. 임금은 크게 기뻐하면서 ‘은혜가 백성에게까지 미쳤다.’며 승진시켰다.
1495년(연산군 원년)에 삼수사를 제수받고, 1501년(연산군 7)에 용양위, 1504년(연산군 10)에 강계부사가 되었다.
중종반정 때 변방을 사수하여 화를 면하다
중종 때는 순천 부사, 원주 부사, 경흥 부사 등을 역임하고, 1523년(중종 18)에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무신년의 사화(士禍)로 나라에 큰 변란이 일어났을 때 조정 대신들이 의리(義理)에 투철하지 못하여 벼슬을 그만둘까 망설일 때 장백손은 갑자년에 스스로 외직(外職)을 자청하여 강계(江界)를 지켰고, 중종이 왕위에 오른 때에는 경흥창수(慶興倉守)가 되었으며, 그 뒤 순천(順天), 원주(原州), 경흥(慶興) 등 외직을 두루 역임했다. 장백손의 이 같은 처신은 ‘날이 밝으면 길을 가고 해가 지면 날 밝기를 기다리는 태도’라고 평가받는다.
장백손은 향리로 돌아온 후 통정대부에 제수되었다. 향리로 돌아온 장백손은 자연경관을 벗 삼아 두루 거닐며 퉁소를 불고 시를 읊으며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겼다.
왜적의 침입을 막고자 현청을 고읍성으로 옮기다
이때에 울진현청인 고산성이 기울어지고 성안에 식수가 부족하였다. 장백손은 만일 왜적이 쳐들어온다면 방비하기 어려울 것이라 판단하여 산성을 고읍성으로 옮길 것을 임금께 간청하여 실행에 옮겼다.
당시 고산성이 왜구의 침입으로 불타버리자, 한성판윤 장순열(張巡烈)이 상소하여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기에 알맞은 고산성으로 옮겨 축조했다. 당시 석축의 규모는 주위가 2,566척이고 높이가 9척이었다고 전한다.
1528년(중종 23)에 경흥부사 장백손이 ‘고산성은 도로가 험난하고 성지의 경사가 심하며 음료가 부족하여 유사시에는 장구한 방어가 불가능하다.’라며 상소를 올려 1529년에 울진현령 권박(權博)이 옛 고읍성 터인 옥숙동으로 이축했다.
장백손의 생애를 가늠할 수 있도록 그의 후손인 장림, 장헌규, 장인환, 장영철 등이 1967년 10월에 「실기(實記)」를 바탕으로 남진영(南軫永)이 지은 비문을 새겨 죽변면 후정2리 매정마을의 용호현에 유허비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