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장시성(張時聖)
본관 : 울진(蔚珍)
: 화언(和彦)
: 죽파(竹坡)
‘입심일일(立心一日)’로 장부의 꿈을 키우다
장시성(張時聖)은 자가 화언(和彦)이며 호는 죽파(竹坡)이다. 가선대부 장경기(張景箕)의 아들이다. 1848년(헌종 14) 1월 7일에 본가인 북면 신리에서 출생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자태가 단정하고 기량이 엄정하여 성인다운 기량이 있었다. 일찍이 ‘입심일일(立心一日)’이라는 네 글자를 적어 작은 주머니에 항상 가지고 다녔다.
장시성은 후정리에 있는 몽양사에서 수학했다. 이 무렵의 강학자세를 그의 아들 장영전은 󰡔가장(家狀)󰡕에서 “학업은 반드시 정밀하게 하였고 도를 치밀하게 연구하였으며 경서와 역사서를 널리 공부하고 제자백가의 책은 가려 뽑아서 베끼고 고금의 좋은 글을 항상 외우고 익혔다.”라고 기록했다.
장시성은 부친의 가르침대로 입신양명을 위해 강학에 매진하는 한편, 틈틈이 직접 농사를 지어 주경야독의 자세를 실천했다. 여러 번 과제에 응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관동 유생의 소두(疏頭)가 되어 「위정척사소」를 짓다
구한말 국제정세가 급변하고 일본을 비롯한 외세의 간섭이 횡행하자 장시성은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홍재학(洪在鶴, 1848~1881)과 더불어 위정척사운동에 뛰어든다. 그는 1881년(고종 18) 홍재학과 함께 관동지방 유생의 대표를 맡아 유생을 집결시키는 한편, 척사의 소(疏)를 올리는 소두(疏頭)를 맡아 홍재학과 함께 죽을 각오로 「본도유생위정척사소(本道儒生衛正斥邪疏)」를 작성한다.
위정척사에 실패하자 세상일과 연을 끊고 도학탐구에 열중하다
그러나 그의 상소는 홍재학의 상소와 함께 임금의 윤허를 얻지 못했다. 또한 이 무렵 간재 전우선생이 ‘갑오경장 오적을 처단할 것’을 담은 상소를 수차례 올렸으나 왕이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개화파가 권력을 장악하자, 장시성은 세상일과 인연을 끊고 날마다 『심경』, 『성리전서』, 『역의』, 『강목』 등의 책을 탐독하며 조용하게 앉아서 학문을 도야하는 데만 힘썼다. 또 부모님을 섬기는 일, 농사에 관한 일, 자식 교육에만 매진하였다. 만년에 그는 강당을 짓고 ‘존경’이라는 당호를 걸고 또 집 후원에는 대나무 숲이 우거져있으므로 스스로 호를 ‘죽파(竹坡)’라 하고 날마다 고을의 수재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시를 지으며 유유자적했다.
신묘년에 고을이 수해를 당하여 거의 추수도 못 할 지경에 이르자 관청에서 특별히 장시성을 천거하여 백성을 궁휼할 적임자로 추천했다. 장시성은 예조에 상소하여 잡색(雜色)과 부역 및 조세를 모두 면제받게 하였다.
1910년, 마침내 그토록 물리치고자 했던 일본에게 국치를 당하던 해인 경술년 11월 14일에 일생을 마치니 향년 63세였다. 그의 장례는 유월장(踰月葬)으로 이듬해 2월에 치렀다. 묘소는 북면 덕구리 정치산(鼎峙山) 동쪽 산록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