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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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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구원(田九畹)
, 1615년 ~
16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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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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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潭陽) |
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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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칙(正則) |
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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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愚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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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이야기 |
전구원(田九畹)은 15세기 후반부터 발아한 울진 유학의 흐름을 잇고 이를 체계화하며 중흥시킨 인물로 평가받는다. 전구원은 자가 정칙(正則) 호가 우와(愚窩)로 봉례(奉禮) 전진(田晉)의 8대손이며, 현감과 통훈대부를 지낸 전효선(田孝先)의 후손이다. 1614년(광해군 6)에 신리(현, 북면 신화리)에서 취죽헌(翠竹軒) 전유추(田有秋)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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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세 때 중양절 시를 읊어 주위를 놀래다 |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아홉 살 때 중양절(重陽節) 모임에서 “나그네는 푸른 하늘 달에 취하고, 단풍은 구월산에 붉었네(客醉靑天月 楓丹九月山)”라고 시를 읊어 주위를 놀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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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휴 임유후 선생의 문하에 들다 |
만휴(萬休) 임유후(任有後, 1601~1673)는 17세기 전기에 울진으로 내려와 20여 년간 기거하면서 고산서원과 몽천재를 중심으로 후학을 양성했다. 전구원은 14세 때 동생 전구주(田九疇)와 전구령(田九齡)과 함께 임유후와 친교를 맺고 있던 부친 전유추의 권유로 임유후의 문하에 들어가 몽천재에서 수학했다. 삼 형제가 임유후의 문하에서 명성을 날리니, 사람들은 그들을 ‘죽림삼봉(竹林三鳳)’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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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의 굴욕을 충절 시로 달래다 |
1626년(인조 4) 병자호란 때 임금이 삼전도에서 굴욕적으로 항복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전구원은 「도동해시(蹈東海詩)」를 지어 “오랑캐는 백 년을 지탱할 수 없다.”라고 비분강개했다.
1640년(인조 18)에 강원도 관찰사 백주(白洲) 이명한(李明漢)이 울진을 순방하다가 전구원을 만나 육언시(六言詩) 한 수를 지어 건네니, 전구원이 즉석에서 “무릉도원 같은 동네에 구름이 가득 덮이고 / 율리(栗里)의 석 달 봄은 술 취한 돌밖에 없구나 / 마을은 외지고 수레 소리는 드문데 / 시절이 태평하여 마당의 꽃은 떨어지기만 한다네(桃源一洞雲關 栗里三春醉石 村深車馬稀尋 歲晏庭花屢落)”라고 화답했다. 이명한이 “그대가 시 짓는 방법은 마치 백설(白雪)과 같다.”라고 감탄하며, 소금 한 섬을 주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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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으로 유학하여 진사시에 급제하다 |
전구원은 28세에 성균관으로 나가 수학했다. 1642년에 성균관에서 수학하며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향리인 신리로 내려와 군자정과 구장서재를 짓고 강론과 후학양성에 매진했다. 당시 전구원과 함께 학문을 교류하며 후학을 양성하던 유생은 우암(憂菴) 윤시형(尹時衡), 만은 전선, 한재 주필대, 어사재(於斯齋) 주환벽, 신광락(申光洛), 박수현(朴壽賢), 황식(黃湜)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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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음주례서를 지어 향촌을 교화하다 |
1684년(숙종 10)에 울진군수 서파(西坡) 오도일(吳道一)이 청사 앞에 태고헌을 짓고 전구원을 강장(講長)으로 모셨다. 전구원은 ‘태고헌향음주서(太古軒鄕飮酒序)’를 서술하고, 고을의 유생과 선비들을 모아 경서와 예법을 가르치니 울진지방의 예악이 진작되었다. 오도일이 서장관으로 발탁되어 울진을 떠날 때, 전구원에게 공책 한 권을 주며 “사적인 원고를 위하여 온 것인데 말 모는 관직[天駟]이 진보가 빨라야 하는데 용열한 둔마가 따라잡을 바가 아니다. 만약 전구원이 처음 벼슬을 했더라면 어찌 오늘날의 문장을 짓는 데 있어서 우두머리 자리를 양보했겠는가?”라 하였다. 이 원고가 서울지역의 학사대부들 가운데 문장에 능한 사람들에게 두루 전달되어 하루 사이에 서울의 종이값을 올라가게 하였다. 이로부터 서울의 선비들이 우와의 품격과 기질을 사모하여 ‘관동의 사표(師表)’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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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장정사에 배향되다 |
전구원은 1691년(숙종 17)에 77세로 세상을 마감했다. 울진의 유생과 선비들이 ‘우리 고을이 문풍으로 소문이 있게 된 것은 모두 선생의 덕택’이라 하여 1703년(숙종 29)에 구장사(龜藏祠)에 봉안하고 매년 음력 10월 10일에 향사를 지냈다. 1863년(철종 14)에 만은 전선을 추급하여 배향했다. 1868년(고종 5)에 서원이 철폐되고 그 자리에 유허각을 지어 향사를 지낸다. 강학을 하던 강당인 구장정사(龜藏精舍)는 보존되어 있으며, 우와집(愚窩集) 상하권이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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