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전선(田銑)
본관 : 담양(潭陽)
: 만은(晩隱)
증직및기타 :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
생애이야기
전선(田銑)은 묵암(默菴) 전필위(田弼違)의 손자이자 사천 현감을 지낸 전효선(田孝先)이 5대손이다. 벼슬은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에 추증되었다. 1599년(선조 32)에 신리(새마)에서 출생하여 1693년(숙종 19)에 향년 95세로 졸하였다.
9세에 오언시를 지어 주위를 놀래다
전선은 어려서부터 영민하기로 이름이 났다. 아홉 살 나던 해에 외조부의 수연 자리에서 읊은 오언시(五言詩)가 전한다.

팔십 노인의 높은 자리에
한잔 술로 만년 수(壽)를 빌도다.
자손이 안팎으로 많아서
기뻐 웃고 노래하고 춤추네.
이이첨을 참하는 상소를 올리다
전선은 평생을 경전을 연구하고 의리를 구명하고 실천하는 데 힘썼다. 특히 정통 성리학적 세계관을 존중해 위정척사(衛正斥邪)를 중대한 실천의 도리로 삼았다. 이의 대표적인 사례가 ‘이이첨 삭탈 소’이다. 전선은 광해군 때 이이첨(李爾瞻)을 능지처참시킬 것을 주장하는 소(疏)를 올렸다. 이때 나이 20세 무렵이었다.
과거에도 여러 번 응시하였으며 벽지에서 물욕 없이 학문을 즐기며 한가로이 지냈다. 임영(臨瀛, 강릉의 옛 이름)의 송담서원(松潭書院) 문회에 참석한 후 문명이 널리 알려졌다. 성헌(省軒) 최문식(崔文湜), 반초당(反招堂) 이명익(李溟翼), 구재(鳩齋) 김계광(金啓光)과 시문으로 교류했으며, 백주(白洲) 이명한(李明漢), 상촌(象村) 신흠(申欽), 우암 송시열의 사상을 좇았다.
전선은 고향에 기거하면서 우와(憂窩) 전구원(田九瑗,), 만휴(萬休) 임유후(任有後) 등과 학제의 연을 맺어 도의를 강론하고 향중의 학문을 북돋는데 평생을 바쳤다.
우암을 만나고 평생 사표로 모시다
송시열(宋時烈)이 유배길에 이 울진지방을 지날 때, 전선이 송시열을 여러 날 극진히 모시며, 송시열의 심성설(心性說)을 깊이 받아들였다. 전선의 학문적 깊이에 감복한 송시열이 “이는 내가 북방에 와서 처음 얻는 사람이다.”라고 칭송했다.
전선은 “삼조(三朝)에 세 번 울었으니 모발이 희었고 / 북쪽 귀양 어인 일로 남으로 또 가시오 / 몸이 성주(聖主)를 떠나니 은견(恩譴)을 알겠고 / 옷을 주신 영왕(寧王)의 총광(寵光)에 울었도다 / 장해(瘴海)의 깊은 연기 여관에 쓸쓸한데 / 화산의 밝은 달은 모옥을 비치누나 / 창밖의 두견 소리 듣기도 두려운데 / 배웅하는 저녁바람 눈물이 옷 적시네.”라며 송시열과의 이별을 슬퍼했다.
전선의 석별 시에 송시열은 “늦은 봄 귀양 가는 나그네 역소에 발길을 멈추고/ 꾀꼬리 무리가 우는 소리에 깜짝 놀라네 / 앞에 있는 푸른 바다 깊이 천 척이라 한들 / 전선이 날 보내는 정 비할 수 있을까.”라고 화답했다.
1858년(철종 9년)에 「옥계당안(玉溪堂案)」에 오른 선비들이 별묘(別廟)를 세워 송시열을 모시는 옥계서원의 사당 옆에 전선을 봉향하고, 우와(愚窩) 전구완(田九琬)을 모시는 구장사(龜藏祠)에 함께 배향하였다. 또 1858년, 무오년에 후손들이 북면 신화2리 화동(花洞)마을 입구의 산록인 ‘동산미’에 유허각을 세우고 전필위와 함께 봉향했으며, 2004년에 그 후손들이 개축했다. 유집(遺集)인 󰡔만은집(晩隱集)󰡕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