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전이석(田爾錫)
본관 : 담양(潭陽)
: 주경(周卿)
: 송암(松菴)
생애이야기
전이석(田爾錫)은 자가 주경(周卿)이고 호가 송암(松菴)이다. 1599년(선조 32)에 태어나 1652년(효종 3)에 죽었다.
전이석은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울진지방에서 ‘효(孝)의 사표(師表)’로 추앙받았으며, 죽은 뒤에 후손들과 유림에서 그가 거주했던 죽변면 후정리에 몽양사를 세워 배향했다. 몽양사에 함께 배향된 한재(寒齋) 주필대(朱必大)는 전이석의 효성에 감복하여 자신이 거주하던 후정리 ‘후당’마을의 집과 재산을 물려줄 정도였다. 또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좌승지, 대사성에 오르고 청백리에 녹선(錄選)된 세마(洗馬) 이광정(李光庭)이 그의 효성과 죽음을 애도하여 묘갈명(墓碣銘)과 향사(享祀) 축문을 직접 지어줄 정도였다.
이광정은「묘갈명」에서 “전이석은 어머니가 일찍 병이 들자 손가락을 끊어 피를 먹여 어머니의 생명을 연장시키고, 부친이 등창으로 오래 고생하자 입으로 종기를 빨아내어 낫게 하였다.”라고 전한다. 또 이광정은 “집안이 빈한하여 끼니를 마련치 못하자 바닷가에서 방어가 스스로 튀어나왔으며, 부모가 ‘생선을 넣은 고사리국’을 먹고 싶다고 하자 갈매기가 고기를 집어 떨어뜨려 주고 갔다.”라고 기록했다. 또 묘갈명은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여막을 짓고 상식(上食)을 차리고 집으로 돌아와 부친의 끼니를 대접하기를 삼 년간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라고 전한다. 또 전이석이 병든 부친을 두고 먼저 죽으면서 “노부(老父)를 잘 모실 것”을 아내에게 유언했다 한다. 그때 공의 나이 54세였다.
전이석이 죽자, 향리 사람들이 관아에 아뢰어 당시 안렴사 오명준(吳命峻)이 전이석의 「행장(行狀)」을 찾아 작설지전(綽楔之典: 충신, 열녀, 효자의 집안을 표창하기위해 나라에서 정문을 세워주는 특전)을 도모했으나 이루지 못했다. 몽양사에 배향했다.
효자(孝子) 송암공(松菴公) 유적(遺積) 행략(行略)
“내 일찍이 들은바 송암공 유고집이 몇 권인데 회록 가운데 들어 있으나 글을 알지 못하므로 후대를 기다려 왔었다고 한다. 내가 상자에서 일련의 책을 찾아보니 좀이 먹고 종이가 마모되어 글자를 알아보기 어려웠다. 송암공의 사실이 완연히 이 가운데 있으므로 내가 감읍하여 다시 고쳐 앉아 자세히 읽어보았다. 공은 하늘이 낸 효자였다. 여러 군자의 예에는 어찌 임금의 효자 포상의 은총을 얻지 못했으리오. 오호라! 아쉽도다. 효는 백행의 근원인데 부친의 질병을 당하여 고기를 구하고자 섬에 들어가 구했으며 손가락을 끊어 피를 내어 소생시키니 옛적의 얼음에서 잉어를 넓적다리를 베어 봉양한 그러한 정성으로써 효의 지극함이며 이를 다하였음에도 어찌 되어 이처럼 쓸쓸히 드러나지 않았을까? 후당동의 족인들과 여러 선배 모든 사림이 논의하여 후당 북에 사당집을 세우고 한재 주공 필대와 병향(並享)하기로 하여 봄철에는 거문고창을, 여름에는 시창을, 가을에는 강의를, 겨울에는 예를 익혔다.”

병신년 5월 방손 찬옥 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