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장만시(張萬始)
본관 : 울진(蔚珍)
: 태초(太初)
: 청파(靑坡)
출생지 : 울진 구만동
글재주를 겸한 무인의 집안에서 태어나 유년부터 총명을 발하다
장만시는 1696년(숙종 22)에 울진 구만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계는 강계부사를 지낸 장백손(伯孫)의 손자인 한명(漢鳴)이 평해에 입향한 후, 그의 손자인 호선(好善)이 울진의 구만동에 입향하여 세거해 온 무인의 집안이다.
장만시의 자는 태초(太初)이며 호는 청파(靑坡)이다. 천품이 고명하고 어릴 적부터 학문에 힘써 한 시대의 모범이 될 재목으로 주위의 칭송을 받았다.
그의 부친인 위한(偉翰)은 호군(護軍)을 지냈으며, 경서와 사문에 능하고 성품이 중후하면서 올곧아 향내에 명망이 높았다. 영양남씨 익형(益炯)의 따님과 혼인했으나, 일찍 죽자 당시 학자로 이름이 높은 고파(古坡) 주환벽(朱奐壁)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외조부에게 학문의 첫 장을 깨치고, 당대의 문사 남응창에게 사사하다
장만시는 친가와 외가의 학문의 전통과 명망에 힘입어 외조부인 고파 주환벽에게 사사한다. 장만시가 워낙 총명하여 고파의 문하생 중에 단연 으뜸이었으며, 스승인 고파선생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소년기에 외조부에게 사사하면서 학문의 첫발을 디딘 장만시는 울진 정림리에 거주하는 설운재(雪雲齋) 남응창(南應昌)의 문하에 들어가 입신을 위한 학문을 연마한다. 설운재는 숙종 37년에 있었던 식년시에서 생원으로 급제한 분으로 기휴재(棄休齋) 주필혁(朱必赫) 문하에서 수업하였으며, 효렴(孝廉)으로는 조의재랑(曹擬齋郞)을 지냈다.
양친의 사망으로 입신의 꿈을 접다
그러나 장만시의 입신의 꿈은 무위로 돌아간다. 양친이 동시에 사망했기 때문이다. 특히 장만시는 부모의 상을 잇달아 집상하면서 과중한 병을 얻어 수년간의 투병 끝에 구사회생하기에 이른다.
집안 어른들이 공부를 계속하여 과거에 급제하도록 하라는 권유가 있었으나 공은 “부모님께서 다 돌아가셨는데 누구를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과거공부를 하겠는가?”하면서 그가 거처하는 사랑방 문 위에 사오당(四吳堂)이라는 편액을 걸고 스스로 자신을 경계하였다.
‘사오당(四吳堂)’ 편액을 걸고 자연을 벗 삼아 분수의 도를 실천하다
장만시는 자신의 문집에서 사오를 “내 땅에서 나는 곡식을 먹고(경오전-耕吾田), 내 집의 우물물을 마시고(음오천-飮吾泉), 내 운명에 만족하고(수오천-守吾天), 내 수명대로 산다(송오년-送吾年).”는 의미를 밝혀놓았다. 벼슬하는 것을 뜬구름같이 보고 임천에 묻혀서 농사나 짓고 책을 읽어 마음을 맑히면서 자연을 벗 삼아 살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하겠다.
장만시는 만년에 향리에서 30리 떨어진 근남면의 구미동에 있는 고산서원을 드나들며 당대의 문사들과 교유하고, 후학을 기르는데 전념했다.
종중에 붕익(鵬翼)이란 분이 공의 시를 읽어보고 “시의 격조가 맑고도 건장하여 감히 타인이 추종할 수 없다.”라고 격찬했으며, 간송 전광옥(澗松 田光玉)은 “공의 글 짓는 솜씨가 당나라 말년의 시인들의 사격(詞格)과 같다.”라며 칭찬했다.
고산서원에서 후학을 기르다
장만시는 강학을 하면서 늘 후학들에게 “내 책을 내가 읽고(독오서-讀吾書) 내 거문고를 내가 타고(탄오금-彈吾琴), 내 몸을 나 스스로 돌아보아 살피고(성오신-省吾身), 내 성품을 기른다(양오성-養吾性).”라는 뜻을 강조했으며, 후생들을 가르치는데 아무런 보수를 받지 않고 정성을 다해 가르치니 4·50세가 되었을 때는 그의 주위에 따르는 유생이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장만시는 평생 고산서원(孤山書院)의 창달을 기원했다. 특히 거동이 불편한 말년에도 틈틈이 고산서원을 찾아, 이 고장의 예도가 타지보다 뒤지지 않을까를 걱정하시고, 학문을 강론하고, 선비들이 학문에 전념하도록 격려했다.
장만시는 1745년(영조 21)에 정침에서 임종하니 나이는 74세이며, 그의 묘소는 울진 대흥동 암월산(菴月山)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