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최성겸(崔性謙)
본관 : 강릉(江陵)
: 형부(亨夫)
: 외당(畏堂)
생애이야기
최성겸(崔性謙)은 1882년(고종 19)에 원남면 매화리 윤촌마을에서 태어났다.
최성겸의 가계는 고려조와 단종복위를 꾀하던 충절의 집안이다. 특히 그의 고조부인 관가당(觀稼堂) 최배용(崔配溶)은 조선 중기의 학자이다.
이 같은 가문의 기운을 받아 최성겸은 어려서부터 학문에 눈을 떴으며, ‘공부를 시작하여 매진하다가 통하지 않은 곳이 있으면 침식을 잊어버리면서 해득을 하고야 마는 성격’을 길렀다.

성인이 되어서 무실재 남진영과 정재 남대년 등이 강학하는 소행재를 드나들며 강론을 하고, 멀리 부안의 계화도로 가서 간재 전우선생을 직접 찾아뵙고 그의 문인으로 등재하였다.간재선생으로부터 율곡 이이와 우암 송시열로 이어온 정통 성리학에 바탕을 둔 ‘기발이승설(氣發理乘說)’을 깊이 체득한 최성겸은 향리로 돌아와 무실재, 가암과 더불어 ‘심즉기(心卽氣)설’을 실천하는데 힘썼다.

간재선생이 죽은 후, 그의 문집 발간을 놓고 문인들 간에 갈등이 야기되었는데, 최성겸은 전국의 간재 문인들에게 서찰을 보내어 중재에 노력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경술국치 이후, 자신의 정침이 일제에 의해 강탈당하자 그는 가족을 이끌고 물명산 자락으로 이주했다. 그는 산속으로 이주하여 오두막집을 짓고, “차라리 산중의 무식한 사람이 될지언정 맹세코 적의 관료가 될 수는 없다. 존양의 의리를 굳게 지켜 이 한 몸 깨끗하게 살리라.”라는 결연한 의지를 담은 글을 벽에 걸어놓고 매일 자손들에게 훈도했다.

1913년 계축년에 어머니상을 당하여 탑평에 장사한 뒤, 여막을 짓고 아침과 저녁에 곡하며 절하고 상복을 벗지 않았다. 하루는 호랑이가 여묘살이를 하는 최성겸의 곁으로 다가와 포효하지도 않고 조용히 묘 곁을 맴돌았다. 최성겸은 조금도 두려움 없이 호랑이와 함께 여묘살이를 했다 한다. 매일 5리 바깥에서 물을 길어다 상석을 차렸는데, 하루는 묘 부근에서 샘이 솟았다. 주위에서 모두 호랑이가 효성에 감복하여 샘을 솟게 해주었다며 그의 효성을 칭송했다.

삼년상을 마친 어느 날, 도지사 이규완과 군수 이택규가 찾아와 세상에 나올 것을 강요하니, 최성겸은 “선비의 출처가 치세와 난세에도 구분이 있는데 하물며 왜놈의 세상에 어떻게 출세를 한단 말인가.”하니 모두 부끄러워서 도망갔다고 전한다.

삼군도진무사(三軍都鎭撫使)를 지냈으며, 아들과 함께 단종복위를 꾀하다가 순절한 18대조인 정재공(貞齋公) 최시창(崔始昌)부자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단양의 숙모전에 배향하고, 고향인 죽포 언덕에 경충단(景忠壇)을 지어 향사를 모셨다.

또 정재공의 퇴실을 수집하여 단종사에 보판을 하였다. 방조인 몽와유집『夢窩遺集』도 수집하였고, 주례집람『朱禮輯覽』, 퇴계(退溪), 여헌(旅軒), 성담(性潭), 간재(艮齋) 등 여러 유현들의 예설을 모아 책으로 엮어 펴냈다.

말년에 고조부인 관가당 배용이 건립한 사랑채를 집서당(集書堂)으로 꾸며, 수천 권의 서적을 쌓아놓고 후학들에게 이용토록 하였다.

1938년 12월에 임종했으며, 간재의 문하에서 함께 동문수학한 덕천(悳泉) 성기운(成璣運, 1877~1956)이 묘갈명을 썼다. 성기운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중반까지의 격변기 속에서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정점으로 하는 기호학파의 도통을 계승한 간재(艮齋) 전우(田愚, 1841~1922)의 제자이며 마지막 유학자이다. 묘소는 오산리 온막산의 고조부 묘 아래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