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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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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국(鄭然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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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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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延日) |
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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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모(彦模) |
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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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재(絅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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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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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군 북면 금성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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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이야기 |
정연국(鄭然國)은 1898년(광무 2)에 울진군 북면 금성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계는 연일정씨로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를 중시조로 하는 포은공파의 7세손인 사과공(司果公) 정세옹(鄭世雍)의 후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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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실재 남진영을 만나 의리학에 눈 뜨다 |
정연국은 어려서부터 품성이 강직하여 과단성이 있고 총명하였으며 일찍이 학문에 뜻을 두어 주위로부터 명성이 높았다.
처음에는 인근의 서숙에서 문장을 공부하였으나 무실재 남진영과 정재 남대년을 만난 후로는 시문은 공부할 만한 내용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의리학에 몰두했다. 사실상 남진영으로부터 경학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이다.
정연국은 매일 30리를 걸어 남진영이 강학하는 소행재에 가서 의리학의 오묘한 이치를 궁구했다. 이 무렵에 정연국은 남진영으로부터 ‘경재(絅齋)’라는 호를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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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를 걸어 간재 전우의 문하에 들다 |
남진영으로부터 실천학문의 길을 얻은 정연국은 천리 바깥에 있는 전우를 직접 찾아가서 그 문하에 들어간다. 정연국은 전우로부터 심성론을 심도 있게 전수받는다.
전우가 죽은 뒤 정연국은 전우의 애제자인 석농(石農) 오진영(吳震英)을 따라 충북 음성으로 들어간다. 정연국은 수년간 잠심 독서하여 후에 자신의 독자적인 학설인 지행합일론을 구축한다.
당시 일제의 탄압이 날로 극심했으나, 정연국은 추호의 흔들림 없이 학문에 몰두하고 의리를 실천하며 항상 올바르게 의리를 실천할 수 있도록 대비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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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인들 간의 분열을 무릅쓰고 간재문집을 발간하다 |
전우가 죽은 뒤 그의 문집 발간을 둘러싸고 제자들 간에 음해와 갈등이 있었으나, 정연국은 석농 오진영을 도와 마침내 1924년경에 원집 43권, 속집 16권 합 30책의 『간재집(진주본)』을 발간한다. 그러나 이 문집발간은 결국 간재 문인들의 분열을 가져왔다. 그 후 오진영은 일본을 배격하는 내용 때문에 국내에서 간행하지 못한 글들을 묶어 저자의 별호를 딴 『추담별집(秋潭別集)』이라는 이름으로 중국 상해에서 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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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재심성변(省齋心性辨)을 지어 퇴계의 칠정기발설을 공박하다 |
정연국은 이 무렵, ‘심(心)’과 ‘성(性)’의 논란과 관련하여 심즉리설(心卽理說)을 주장한 퇴계의 사단이발·칠정기발설에 대해 「성재심성변(省齋心性辨)」을 지어서 영남의 선비들이 불교와 양명학과 다름이 없다는 점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정연국은 평생 도학의 실천을 궁구하며 전우, 오진영, 단운(丹雲) 민병승(閔丙承)을 섬겼고, 무실재 남진영, 정재 남대년, 양재 권순명, 현곡 유영선 등과는 평생 학형이자 학문의 동반자로서 교유했다.
정연국은 73세 되던 1970년 2월, 고향인 금성리로 돌아와 자신을 실천 의리학의 길로 인도한 무실재 남진영을 마지막으로 만난 뒤 9일째 되는 날에 사망했다. 그의 묘소는 북면 금성리 성황산 남쪽 산록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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