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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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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개신(朱介臣)
, 1572년 ~
164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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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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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新案) |
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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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립(公立) |
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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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당(二友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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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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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울진 구만동(九萬洞) |
출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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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울진 |
분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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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군 남쪽 내성산(內城山)의 해좌(亥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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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효전가(忠孝傳家)의 가풍을 실천하였던 선비 |
주개신(朱介臣)의 조부는 연일(延日)·경원(慶源)·의주(義州)에서 교수(敎授)를 지냈던 독송정(獨松亭) 주세창(朱世昌)이다. 주세창은 그의 호가 말해주듯 청렴 강직한 사람이었다. 더구나 그는 효행이 뛰어났던 사람이다. “주세창이 부친 주행(朱幸)의 여묘(廬墓)살이 때 호랑이가 샘물 나는 곳을 가르쳐주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와 송강(松江) 정철(鄭澈), 월천(月川) 조목(趙穆)과 교유하였다.
이러한 가풍은 주개신에게 그대로 전승되었다. 어려서부터 뛰어나게 총명하여 경전과 사서(史書)를 넓게 통달했다고 한다. 양친을 섬길 때에는 효성과 공경을 다했고 형제간에는 우애가 지극했다. 대범하고 출중하며 의기가 있었으나 세간의 모든 영욕과 득실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는 바가 없었다. 방정한 품행은 일찍이 이웃마을에까지 알려져서 학문과 수양을 쌓은 친구들이 모두 그를 공경하고 존중했다.
1611년(광해 3)에 정인홍(鄭仁弘)이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과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묘 종사를 반대하였다. 지방의 선비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이 일의 부당함을 탄핵했는데, 주개신은 선비들의 상소문을 담은 함을 들고 승정원에 직접 전달하였다. 그는 이 자리에서 언로를 막는 것에 대해 대신들을 나무랐다. 모두가 정인홍의 눈치를 살피느라 아무도 이 일을 대신할 사람이 없었다. 승정원 관리들이 모두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그는 연속 네 차례의 상소를 올렸지만 끝내 임금의 비답을 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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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와 대나무를 닮은 선비로 살다 |
주개신은 네 차례의 상소를 올렸지만 비답을 받지 못하자 고향에 돌아와 산수 사이를 소요하면서 다시는 당시의 세상일을 생각하지 않았다. 만년에는 살던 집을 동생에게 양보하고 산수가 고요하고 후미진 지금의 원남면 매화의 몽천(蒙泉)가에 집을 짓고 이거하였다. 뜰에는 매화와 대나무를 심어 놓고 이를 벗삼으며 살고자 자신의 호를 이우당(二友堂)이라 짓고 편액하였다. 임유후가 지은 「이우당기문」에는 그 상황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남쪽 마을(몽천)에 주씨 어르신 개신(介臣)이 이우당이라는 서당을 짓고 날로 시를 읊고 술을 마시며 놀고, 스스로 즐기면서 가로되 ‘매화와 대나무는 내 친구다’ 하거늘 <중략> 옹은 대개 하늘을 즐기고 도리를 체득한 자인데 내가 옹의 뜻한 바를 알겠다. 집 위에 푸른 산은 어진 자가 즐기는 바이고, 문 앞에 흐르는 냇물은 지혜로운 자가 즐기는 바인데, 어르신이 당(堂)의 오른쪽 뜰에 풀과 나무와 꽃들이 즐비하건만 돌보지 않고 오직 매화와 대나무만을 바라보며 친구라 하니, 심하다. 어르신의 좋아함이여! <중략> 어르신이 가로되 ‘착하다. 자네가 먼저 내 마음을 알았구나.’”
주개신은 거동과 표정이 준수하고 지조가 높았다. 그래서 차라리 옛사람의 정신을 배우다가 그에 도달하지 못할지언정 속된 선비로 성공하는 것은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정의와 의리와 마음가짐이 분명했던 사람으로 마치 그의 호처럼 매죽을 닮은 고결한 인품이 여러 곳에서 보인다. 이러한 까닭으로 원근 제현들이 모두 기꺼이 그와 더불어 교분을 맺었다. 임유후는 주개신의 묘지명에서 “주개신은 체격과 키가 크고 풍모가 준엄하고 성격이 민첩하며 마음이 후하고 지혜가 많아 의논을 좋아했으나 재물을 몰랐다. 항상 있는 것 같아서 늙어 죽을 때까지 가난하면서도 의리만을 숭상했으니 향당과 친척이 모두 다 그를 아끼고 중히 여겼으며 나와도 더불어 즐거이 교유했다. <중략> 몽천 샘터 위에 집을 짓고 주위에 매화와 대나무를 심고 이를 호로 삼아 이우당이라 했다. 살림이 가난하여도 인성이 좋아 친구들의 방문이 끊일 날이 없었는데 급기야 죽으니 장사지낼 대책이 없었다. <중략> 옛적에 마소유(馬少游)가 말하기를 선비가 이 세상에 나서 지위가 낮은 벼슬을 해도 향리에서 어진 사람이란 칭송을 들으면 족하다 하였으니 그 말이 옳다. 이우당이 그렇구나.”라 하였다. 1640년(인조 18) 향년 69세로 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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