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주경안(朱景顔) , 1536년 ~ 1614년
본관 : 신안(新安)
: 여우(汝愚)
: 충효당(忠孝堂)
출생지 : 울진읍 구만동
출신지 : 울진군
분묘지 : 군의 북쪽 10리 박곡동
증직및기타 : 통덕랑(通德郞)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하늘이 내린 효자
주경안(朱景顔)의 자는 여우(汝愚)로 1536년(중종 31)에 울진 구만동에 태어났다. 천성이 순후하고 곧고 정직하며 모든 일을 행함에 있어 정성스러웠고 어려서부터 이미 부모와 웃어른을 섬기는 법도를 알았다. 부친은 통정공(通政公) 주세홍(朱世弘)으로, 학질을 오래 앓아 치료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백방으로 약을 수소문하던 차에 어떤 이가 “사람피가 가장 좋다” 하자 주경안은 즉시 자기 손가락을 잘라서 피를 내고 태워서 술에 타서 드렸다.
부친이 온몸에 부종이 나서 몹시 고생하는데 보는 사람마다 ‘지렁이 즙’을 써야 낫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때가 엄동설한이라 구할 방법이 없었다. 그는 생각 끝에 후원 앵두나무 아래 우물가에 가서 주위를 깨끗이 청소하고 일주일을 밤낮으로 정성스레 기도를 드렸더니, 아침에 부근에 지렁이 똥이 있는지라 그곳을 파서 지렁이를 잡아 즙을 해드렸다.
또 모친이 종기로 몹시 괴로워하였다. 침과 약을 쓸 수가 없자 그는 직접 환부를 빨아내어 차도를 얻었다. 그 후 고을의 몇 명이 그것을 본받았다. 또 한식절을 맞이하여 선조의 묘제를 올리려 하였으나 마침 바다와 육지가 모두 흉년이 들어 제육을 구하지 못했다. 말총으로 아홉 개의 그물을 만들어 밭 가운데 꽂아 두었는데 갑자기 대설(大雪)이 내리므로 그물을 걷으려 밭에 나가니 비둘기 여섯 마리가 걸려 있었다. 비둘기를 잡아서 묘제에 쓸 수 있었다. 이것을 본 마을 사람들은 그것을 기이한 일이라 여기지 않고 그의 지극한 효성이 만들어낸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부친이 매번 출입할 때면 직접 말안장을 잡고 지팡이와 신발을 들고서 앞뒤로 부축하며 노복의 수고를 대신하였다. 양부모가 돌아가자 슬픔으로 3년 동안 죽을 먹으며 시묘살이를 하였고, 부모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더욱더 간절하여 아침저녁으로 배묘(拜墓)하였다. 제사를 모실 때는 반드시 목욕재계하고 직접 제물을 장만하였으며 남에게 맡기지 아니하였다.
그의 지극한 효행은 1578년(선조 11)에 향리의 유림과 본현 훈도(訓導) 진사(進士) 서천일(徐千一)이 조정에 아뢰어 생시에 정표(旌表)로 정해지고, 󰡔삼강록(三綱錄)󰡕에 등재하였다. 정려각(旌閭閣)은 울진읍 고성리 청고동 동편에 있다.
문정후(文正后), 인순후(仁順后), 명종왕(明宗王), 인의후(仁懿后), 선조왕(宣祖王) 상에는 다 같이 3년의 상복을 입었다. 선조가 죽을 때 그의 나이 73세였음에도 역시 죽을 먹으며 삼년상을 했다. 부모님상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오직 충과 효로 정성을 다하며 살다가 1614년(광해군 6) 2월 27일 잠자리에서 졸하니 향년 79세다. 추호(追號)는 충효당(忠孝堂)이다.
스스로 나라에 충성하다
주경안은 가정에서나 국가에 대한 마음이 한결같아 일생 동안 흔들림이 없었던 선비였다. 임진왜란 때 선조가 궁궐을 비우고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분통함을 금치 못하였다. 나가 싸우고자 하였으나 고령이요, 군량을 도우려니 집이 가난하였다. 대신 하늘에 기도하여 신의 도움으로 적을 물리치고자 하였다. 산 아래 돌을 직접 날라 석단 2층을 쌓고 매일 새벽에 목욕재계하고 향을 피우며 하늘에 7년간 기도한 곳이다. 기도하기를 “하늘이 차마 우리의 종묘사직을 불타게 두겠는가? 하늘이 차며 우리 백성이 살육당하도록 그냥 두겠는가? 지극한 불인(不仁)이 지극한 인(仁)을 치고, 극악무도함이 선량함을 치도록 하늘이 어찌 차마 그냥 두겠는가? 적군의 수명이 오래도록 지속되고 우리 임금이 궁궐 밖에 오래 머무는 상황을 하늘이 어찌 차마 그냥 두겠는가?” 이처럼 기도하기를 무려 칠 년을 하루같이 하였다.
주경안은 집역자(執役者)가 혹 제단에 향과 물을 공급하는 것을 게을리할까 걱정하여 밭 한 뙈기를 주어서 보상 격려하고, 자신은 조석으로 죽과 솔잎가루만 먹을 뿐이었다.
비록 날씨가 춥거나 덥거나 하루도 그치지 않았다. 주위의 사람들이 처음에는 비웃었으나 나중에는 감탄하면서 “자신은 노쇠한 나이에도 불구하고 죽을 먹으며 7년 동안이나 동산에 오르고 있으니, 이는 고금에 드문이다. 하늘이 어찌 감동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이 걱정하며 그에게 밥 먹기를 권하였다. 그러자 그는 군부(君父)께서 욕된 상황에 처해 있으니, 자신은 아무 것도 먹을 생각이 없으며 국가의 부흥을 기다려서 먹어도 늦지 않을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주변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주효자(朱孝子)’라 칭하고 7년간 하늘에 기도하던 그 석단을 축천대(祝天臺)라 부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