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주세창(朱世昌) , 1508년 ~ 1580년
본관 : 신안(新安)
: 대유(大猷)
: 독송(獨松)
충절과 학행의 집안에 태어나다
독송 주세창의 집안은 고려조에 충절을 지킨 목민관이자 청백리를 다수 배출한 명문가이다. 그의 14대조인 주열(朱悅)은 고려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학사를 제수하고 문절공(文節公)의 시호를 받았다. 또 그의 11대조인 주사충(朱思忠)은 고려 공민왕 때의 문관으로서 홍건적의 난을 평정했으며, 고려사(高麗史)에 등재될 만큼 뛰어난 정치가였다. 증조부인 주계정(朱繼禎)은 문과에 급제한 뒤 현감을 지냈으며,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과 학문을 교류할 만큼 학행이 뛰어났다. 조부인 주선림(朱善林)은 울진 입향조이며, 60세의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전의 군수를 역임했으며, 통신부사로 일본에 들어가서 언행이 반듯하자 왜인들이 ‘조선의 현대부(賢大夫)’라 칭할 만큼 언행이 곧았으며 청백리로도 이름났다.
부친은 충순위부사직(忠順衛副司直)을 지낸 주행(朱幸)이며, 그의 둘째아들인 주세창이 어려서부터 원대한 기질을 보이고 사소한 것에 집착하지 않고, 효성과 우애로움을 보이니 매우 사랑했다. 모친은 안동권씨 좌사간(左司諫) 권정(權定)의 증손자인 권인(權仞)의 딸이다.
한양에서 문사(文士)와 어울리다
청년기에 부친 권행이 한양에 거처할 집을 마련하여 유학을 보냈다. 주세창은 수년 간 한양에 머물면서 여러 사대부들과 교유하며 학문과 시를 익혔다. 부친이 별세하자 고향인 구만촌(九萬村)으로 내려왔다. 장례를 치르고 부친의 묘소 옆에 여막을 짓고 3년간 상식(上食)을 올렸다. 여묘살이를 할 때 우물이 멀어 물을 길어오기가 어려웠는데, 범(호랑이)이 이끄는 대로 가보니 샘물이 있었다 한다.
조정에서 효행의 상으로 삼베 300필과 경언교수 직을 제수하다
주경안 지극한 효성이 조정에까지 알려져 면포 300필을 상으로 내리고, 경원교수 직에 특채되었다. 그 뒤에 또 의주, 연일 교수직을 제수하고, 남쪽과 북쪽 지방을 두루 다니면서 지역 유생들의 학문을 진작시켰다. 주세창은 형제간의 우의가 돈독했으며 빈한한 이웃들에게 재물을 베풀어주는 데도 마음이 후했다. 그의 이 같은 성품을 그의 형인 참봉 주세홍(朱世弘)이 시를 써서 격찬했다.

산을 아낌없이 내어 굶주린 사람을 살리고
제사 때면 ‘쟁쟁’하는 수저 소리 기이하다네
묘에 가려할 때 갑자기 샘물이 솟아나니
지성이 따르는 곳에 신도 알아 감응하네
(非從散財活人飢 祭匙錚錚聞者奇 況是居廬泉湧出 至誠隨處感神知)
농암(聾巖)·월천(月川)선생과 교유하다
주세창은 의주, 경원, 연일의 교수직을 수행하면서 문사(文辭)를 깊이 체득하고 선비들과 신의를 돈독히 하니 많은 문사들이 우러렀다. 당대의 명현이자 「어부가」의 작가 농암 이현보와 영남사림파의 거목인 월천 조목과 학문을 교류하고 시를 함께 읊었다. 이현보가 거주하던 분강촌(현,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에 머물면서 청량산과 분강을 오르내리며 수창한 시가 전한다.
울같은 호수 위에 배를 띄우고
삼월 봄 동풍이 부는데
용이 스린 못 위에 떠 있는 봉황각에 오른 객은
동해 갯마을 초막의 사람이라네
(汎舟鑑湖上 東風三月春 龍池鳳閣客 東海草廬人)

주세창이 이현보와 청량산을 오르내리며 머물다가 헤어짐이 아쉬워 이현보가 주세창에게 건넨 송시(送詩)가 전한다.

큰 포부를 안고 세상에 태어나
벗을 구함에 사람을 몰라서
말없이 한탄하며 얼굴만 찡그리다가
지금 이 겨울에 비로소 그대를 만났구려
(余生大包內 求友眛其人 憫默嘆從頻 今冬始逢君)
남대천 절벽에 독송정을 짓고 강학하다
주세창은 자택 앞의 언덕인 청고(靑皐)에 소나무 한 그루를 심고 정자를 세웠다. 정자 앞은 남대천이 휘돌아 나가고 청고 언덕 위에는 널찍한 반석이 있었다. 이곳에서 주세창은 격암 남사고, 송강(松江) 전양(田讓), 만휴 임유후, 윤몽열과 삼척부사 신문충(申文忠) 등과 교유하며 학문과 시를 논했다. 특히 남사고와 함께 이기도설(二氣圖說)을 깊이 탐구했다. 72세 되던 1580년(선조 13)에 생을 마감했다. 3남 1녀를 두었으며, 묘소는 근남면 행곡1리 미곡마을에 있다.
송강(松江) 정철(鄭澈)이 독송정에 올라 시를 건네다
송강 정철이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영동지방을 순시하다가 구만촌의 독송정을 찾아 주세창을 만났다. 서로 시를 이야기하고 학문을 논하다가 헤어질 때 송강이 독송을 찬양하는 시를 남겼다.

바닷가에서 이 사람 늙었고 / 좋은 시로 우리가 올랐어라
광가로 말속을 경계했고 / 크게 취해 남붕을 어루만지네
(海曲此人老 明詩吾輩登 誑歌警末俗 大醉撫南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