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최익한(崔益翰) , 1897년 ~
본관 : 강릉(江陵)
: 운거(雲擧)
: 돌샘, 창해(石泉, 滄海)
천석지기의 아들로 태어나 영주, 봉화 등지의 시회(詩會)를 휩쓸다
최익한(崔益翰, 1897~?)은 호가 창해(滄海)로 울진군 북면 나곡 2리(속칭 골마)에서 태어났다. 최익한의 가계는 대대로 서울에서 살았으나, 1855년(철종 6)에 이곳 나곡리로 내려와 세거하였다. 문벌이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그의 부친 때까지 천석꾼으로 이름날 만큼 가계가 넉넉했다. 그는 어려서 조부로부터 한학을 익혔으며, 13세 때 경북 봉화에서 있었던 시회(詩會)에 참석하여 장원을 차지할 만큼 글재주가 뛰어났다. 향리에서는 신동으로 알려졌다.
영남학파의 거두 곽종석의 문하에 들다
15세 되던 1911년 무렵에 당시 영남학파의 거두였던 면우(勉宇) 곽종석(郭鐘錫, 1864~1919)의 문하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성리학을 탐구하였다. 곽종석은 거창 출신으로 이황(李滉)의 학문을 이은 이진상(李震相)에게서 성리학을 이어받아 주리(主理)에 입각하여 이기설(理氣說)을 체계화한 성리학자이다. 특히 심산 김창숙과 함께 주도한 ‘파리의정서’ 사건의 주인공이다.
최익한은 5년간 스승인 곽종석의 지도를 받으며 퇴계학의 정수와 한주학파의 이론을 전수받으며 당대의 뛰어난 학자들과 교유하였다. 이때의 공부가 그에게는 훗날 민족주의적 시각에 입각한 국학연구의 기틀을 잡았다.
중동학교에 입학하면서 삶의 전환점을 맞다
5년간 곽종석의 문하에서 수학한 최익한은 스승의 권유로 1917년에 서울의 중동학교에 유학하여 신학문을 익힌다. 이때가 그의 나이 21세 되던 해이다. 중동학교를 1년 만에 마친 최익한은 기독교청년회관에 적을 두고 2년간 영문학을 익힌다. 이 무렵에 최익한은 곽종석으로부터 사사한 이기론의 정통 퇴계학과 신학문을 접목한 민족주의적 세계관을 형성하면서 새로운 삶의 전환기를 맞는다.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영문학을 수학할 때 그는 3·1운동을 경험한다.
정통 성리학과 신학문을 두루 아우른 최익한은 1920년 무렵부터 본격적인 민족운동에 뛰어든다. 그는 1920년에 영주 일원에서 군자금 1천6백 원을 모아 상하이로 보내는 등 상해임시정부의 독립자금모집원으로 활약하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4년형을 선고받고 3년 만에 감형되어 석방되었다.
와세다대학에 입학하고, 본격적인 사회주의운동에 뛰어들다
최익한은 석방되자 곧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에 입학한다. 당시 일본에는 재일본 조선인 유학생들의 단체가 다수 결성되어 있었으며, 이 단체들 대부분이 민족주의적 사회주의 이념을 표방하고 있었다. 최익한은 이들 단체를 드나들며 자연스럽게 사회주의 사상과 만났다. 일본 유학을 통해 사회주의 사상을 깊이 체득한 최익한은 사회주의를 체계적으로 배우기 위해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이루지 못했다.
소련 유학이 좌절된 직후 그는 중동학교의 동창이었던 박락종의 권유로 조선공산당에 입당한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사회주의운동을 전개하면서, 1927년 4월에 조선공산당의 조직부장을 맡는다. 특히 그는 민족협동전선운동의 강화에 매진한다.
일제의 조선공산당 일제 검거로 7년간 옥살이를 하다
최익한은 1927년에 있었던 일제의 조선공산당 일제검거로 동경에서 체포되어 징역 6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용되었다. 그는 1932년 7월 대전형무소로 이감 도중 대전역의 만세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징역 1년을 추가 받아 7년을 선고받았다.
최익한이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복역 중이던 1934년 2월에 그의 장남 최재소(崔在韶)와 차남 최학소(崔學韶)가 울진 공작당 사건에 연루되어 각각 징역 2년 6월형과 3년형을 선고받았다. 3부자가 한꺼번에 옥살이를 하는 비운을 겪는다. 1935년에 출옥하여 가족을 데리고 서울로 이사한다. 최재소는 1937년 3월 고문의 후유증으로 옥사하고, 최학소는 1943년 3월, 창유계 사건으로 다시 검거되었으나 도중에 탈옥하였다.
건국준비위원으로 통일운동에 매진하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최익한은 다시 사회주의 운동을 재개한다. 그는 ‘장안파 공산당’의 중심인물이 되어 박헌영 중심의 ‘재건파 공산당’과 운동노선을 둘러싸고 격하게 대립하였다. 이후 최익한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조사부장으로 활동하였으며, 민주주의민족전선의 중앙상임위원과 기획부장으로 활동하였다. 1947년 12월 통일민족국가의 수립을 목표로 한 민족자주연맹에 참여하였다. 이것이 그가 남한에서 펼친 마지막 활동이었다.
최익한은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가족을 데리고 북한으로 올라갔다. 그 해 8월에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서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김일성종합대학에서 한국사를 강의하기도 했다. 그 후의 활동사항은 전혀 알 길이 없으며, 사망연대도 불명확하다. 저서로는 『조선사회정책사』, 『실학파와 정다산』등이 있다. 그의 아들 최재소는 2000년도에 건국포장 애족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