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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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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응청(黃應淸)
, 1524년 ~
16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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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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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해(平海) |
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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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지(淸之) |
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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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해(大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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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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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해군 기성면 정명촌(正明村) |
출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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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군 |
분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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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성면 방율리 |
입사경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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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2년(명종 7)에 사마시(司馬試) |
외관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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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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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직및기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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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8년(선조 11) 생시(生時)에 정려가 내려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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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다 |
황응청(1524~1605)의 연대기에 대해 자세히 알려진 것은 없다. 다만 그의 문집인 대해집(大海集)에 실린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과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가 쓴 「행장(行狀)」을 보면 그의 일대기에 대해 간략하나마 알 수 있다.
그는 평해인으로 자는 청지(淸之) 호는 대해(大海)로 당시 평해군 기성면 정명촌(正明村)에 살았다. 1552년(명종 7)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뒤 1560년(명종 15)에 세자의 입학을 경축하는 별시문과에 응시하였다가 책제(策題)에 좋지 않은 말이 있음을 보고 과장을 뛰쳐나왔다. 그 후 두문불출하고 산림에 묻혀 유유자적한 삶을 살면서 행실을 더욱 바르게 하고 절조를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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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제(孝悌)의 도리를 다하여 정려(旌閭)가 내려지다 |
부모와 형제 사이에 효제(孝悌)의 도리를 다하여, 양친이 돌아가실 때마다 각각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이 같은 행실과 효성에 감동한 고을 군수들이 관찰사에게 알리어 1578년(선조 11)에 그가 살아 있을 때 정려가 내려졌다.
밀암(密庵) 이재(李裁, 1657~1730)가 지은 정려비(旌閭碑)에 “천품이 도에 가깝고 특히 효성은 하늘이 낳아 평소 고인(古人)의 법대로 따르며 행동을 자제하였다. 바른 몸가짐과 맛있는 음식으로 부모님을 섬기며 안색을 밝게 하여 봉양하였다. 집에 있을 때와 나갈 때나 친인척에 대한 일 처리와 이웃과 고을 사람들을 대함에 어질고 따뜻한 마음으로 도리를 다하였다. 임금에게 「진폐 4조」를 올려 구악의 폐습과 교화를 주장하였다. 황응청 선생은 조용히 청렴한 도를 즐겨 사람이 알아주기를 구하지 않고 의를 몸소 닦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살아있을 때 이미 정려비를 받은 사람이라는 점에서 그가 유가의 도리를 얼마나 잘 실천하며 살았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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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현감을 제수 받다 |
1584년(선조 17) 조정에서 학행지사(學行之士)를 수용할 때 그도 반열에 들어 예빈시참봉(禮賓寺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다시 개성 연은전(延恩殿) 참봉에 제수되었는데, 일단은 명을 받들었지만 얼마 되지 않아서 사직하였다.
왜냐하면 일찍부터 박연폭포의 절경을 한번 가서 구경하기를 원했었는데, 마침 연은전 참봉에 부임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폭포를 실컷 구경하고서 낙향했기 때문이었다. 1594년(선조 27) 조정에서 장원서별제(掌苑署別提)로 그를 불렀다. 당시는 왜란을 치르고 있을 때였는데, 마침 선조가 의주로 몽진하였다가 환도하였다. 이에 신하의 의리로 끝내 자신의 지조만을 지킬 수 없다고 생각하여 대궐로 나아가고 아울러 시폐(時弊) 4조를 논한 상소를 올렸다. 선조가 그의 상소문을 가납하고 그를 진보현감에 임명하였다.
진보현감으로 부임하여 포용력 있는 정사로 다스리다가 2년도 채 안 되어 정명리에 돌아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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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사색으로 사상의 경지를 넓히다 |
낙향 후 후학을 가르치며 독서와 사색으로 사상의 경지를 넓혀갔으며, 월천(月川) 조목(趙穆, 1524~1606)이나 대암(大菴) 박성(朴惺, 1549~1606)과 편지를 주고받고,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1538~1609) 등 당대의 지성들과 교유하다가 1605년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 후 1671년(현종 12) 기성면 정명리에 있는 명계서원(明溪書院)에 봉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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