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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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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중윤(黃中允)
, 1577년 ~
164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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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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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해(平海) |
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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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선(道先) |
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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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東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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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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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안동 내앞[川前洞]의 외가 |
출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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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울진 기성면 사동리 |
분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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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해 북쪽 먹방동(墨坊洞) |
입사경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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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2년(광해군 4)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 |
내관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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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승지, 우부승지, 좌부승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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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최고의 문벌 집안에 태어나 승지에 오르다 |
황중윤(黃中允)의 부친은 공조참의를 한 해월(海月) 황여일(黃汝一)로, 퇴계의 최대 학맥인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의 제자이다. 더구나 황중윤의 외가는 학봉의 중형(仲兄) 되는 귀봉(龜峰) 김수일(金守一) 집안이다. 부친은 말할 것도 없고 조부인 창주(滄州) 황응징(黃應澄)과 종조부인 대해(大海) 황응청(黃應淸) 모두 훌륭한 학자들이었으니, 황중윤은 날 때부터 탁월한 학문적 소질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외삼촌인 김용(金湧)은 황여일에게 “이 아이는 골상(骨相)이 비범하니 진실로 그대의 가문을 빛낼 것이다.”라고 하였다. 1612년(광해군 4) 증광문과에 급제하고 정언·헌납·사서 등을 역임하였다. 1618년 명나라에서 파병을 요청하여 조정에서 징병을 논의하자 이에 반대하였다. 이후 병조좌랑과 사헌부지평을 역임하고 1620년 주문사(奏聞使)로 임명되어 연경(燕京)에 다녀온 뒤 승지가 되었다. 1623년(인조 1) 인조 즉위 후 광해군 추종 세력으로 몰려 유배를 당하는 빌미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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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으로 귀양가다 |
황중윤은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정권이 교체되자 이이첨(李爾瞻)의 복심이 되어 광해군의 뜻에 영합하였고, 중국과의 외교를 단절하고 오랑캐와의 결탁을 주장하였다는 죄목으로 변방 어느 섬으로 유배 가서 갇히게 되었다. 1633년(인조 11)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10년 넘게 참담한 시간을 보낸다.
전라도 해남은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고장인지라 윤선도와 그 부근에 사는 몇몇 선비들이 자주 찾아와 학문을 토론하고 시를 읊고 술잔을 나누면서 지냈다. 윤선도는 그의 종제인 선진(善進), 선일(善一) 형제를 보내 글을 배우게 하였다.
1633년 5월에 인조가 황중윤을 방면해주라는 특명이 있었으나 대간(臺諫)에서 반대하여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소식을 듣고 시를 지었다.
“세상 어디인들 내 견디지 못할 땅 있으랴
하물며 이곳 자연 속에 숨어 지내니 괴로울 게 없구나
문을 굳게 닫고 남과 사귀지 않고 지내니
숲 속의 노란 꾀꼬리는 자재(自在)하게 울어댄다.”
世間何地不堪棲 況是江湖興隠齋
閉門却掃無人事 深樹黃鸝自在啼
황중윤은 이해 11월에 방면되어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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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월당(水月堂)을 짓고 고향산천에서 생을 마감하다 |
고향에 돌아오자 외사촌 동생인 표은(瓢隱) 김시온(金是榲)이 찾아와 위로하며 비분한 회포를 나누었다. 울진현령 난재(懶齋) 신열도(申悅道)도 찾아와 함께 교유했다.
원남면 덕신촌(德新村)에 전답을 마련하고 산건(山巾)을 쓰고 야복(野服)을 입고 농사를 짓거나 기성면 방률리 범밭에 수월당(水月堂)이라는 정자를 지어 유유자적하였다. 그러나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굴욕적으로 항복했다는 소식에 비분하였다. 1628년(인조 26) 3월 29일에 병을 얻어 졸하니 향년 72세다. 당시 평해군 북쪽 먹방동(墨坊洞)에 장사지냈다.
동명의 수월당 시
“옛사람 일찍이 이 누에 오르고 싶어했거니 / 先人會欲此樓身
손 꼽아보니 지금부터 오십 년이 흘렀구려 / 屈指如今五十春
강산의 풍광은 아직도 예와 같건만 / 風月壺天惟似舊
건곤의 인간 세상은 몇 차례나 바뀌었나 / 乾坤㤼界幾回新
연하는 이미 전가물로 만들었거니 / 烟霞己作傳家物
구릉은 즐겨 세상을 피할 장소 되었다네 / 邱壑甘爲遯世人
사슴들도 다시 주인을 얻은 것 기뻐하는 듯 / 麋鹿亦欣重得主
숲에서 걸어 나와 서로 친하려 하는구나.” / 出來林麓自相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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