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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료는 이교(李㝯, 1531~1595)의 경술일기(庚戌日記)이다. 퇴계 이황의 형인 온계(溫溪) 이해(李瀣, 1496~1550)가 대사헌으로 재직 시 우의정임명에 대한 반대로 이기(李芑)의 미움을 사서 구수담(具壽聃)의 일파로 몰려 유배되어 사망하게 된 경위를 아들인 이교가 1579년에 기록한 일기다.
이 일기는 7월 16일 사헌부의 서리 임은손이 찾아와 부친이 이전 청홍도(淸洪道, 지금의 충청도) 감사(監司)로 있을 때 유신(惟新, 지금의 충주) 역당(逆黨)의 누락된 노비와 전답 등을 유신현에서 추쇄, 첩보하였으나 본 주인에게 돌려 준 일을 추고한다는 사실을 통보하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이후 관련된 인물인 유섭(柳涉, 사건 당시 청홍도 감사), 유신현의 석구(石求), 석호겸(石好謙, 석구의 아들) 등이 차례로 방문해 문건과 당시의 일을 상의하는 내용이 나온다.
드디어 8월 3일 의금부에 하옥되고 삼사의 궁추(窮推)를 받는 내용과, 이해의 무고를 밝히는 원정(元情)과 둘째 아들 이녕(李寗)의 상소문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8월 10일 같이 형을 받던 이치(李致)가 죽자 갑산(甲山)으로 유배가게 된다. 장형의 여파로 말을 멘 가마를 타고 가다 8월 14일 양주에서 이해가 사망한다. 이후 9월 1일 온혜에 운구가 도착하고 12월 11일 묘소에 장사를 지내는 것으로 사건 경위를 기술하는 내용은 마무리된다. 이후 이교가 이 사건의 경위를 상술하는 내용이 후술되고 마지막으로 1567년(선조 즉위년)에 이 사건과 연루되어 유배 간 35명의 신원이 회복된 내용으로 경술일기가 끝난다.
이 일기의 저자인 이교는 자가 군미(君美)이고, 호는 원암(遠巖), 본관은 진보(眞寶)이다. 1531년(중종 26, 신묘)에 온계 이해의 아들로 태어나 계부(季父)인 퇴계에 나아가 학문을 닦았고 선조 11년(1578)에 벼슬길에 나아가 남부참봉(南部參奉)이 되었다. 경인년(1590)에 대흥현감(大興縣監)에 제수되었고 이후 을미년(1595, 선조 28) 9월에 병사하였다. 저서로 사서질의(四書質疑), 경술일기 등이 있다.
이 일기는 온계 이해의 사망사건을 아들인 이교가 기록한 일기로 당시의 정치상황과 사건의 경위를 자세히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사건의 시작부터 사건의 진행상황이 시간별로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고, 사건에 관련된 여러 인물들의 증언과 임금이 내린 전지(傳旨)의 내용을 상술하고 있다. 또한 일기 가운데 실린 이해의 원정(元情)의 글과 중형(仲兄)인 이녕(李寗)의 상소문 그리고 이교 본인의 후술로 전체적인 사건의 경위를 자세히 알 수 있어 개인과 집안의 기록적 가치뿐만 아니라 사료적으로 보다 가치 있는 일기 자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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