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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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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옹이병탁역상일기(懼翁李秉鐸曆上日記)』는 한산 이씨(韓山李氏) 문중의 이병탁(李秉鐸, 1760~1832)이 쓴 필사본 형태의 일기이다. 현재 이병탁의 일기로 확인된 일기는 총 6책(1책: 1823년 1822년, 2책: 1819년 1818년, 3책: 1821년 1820년, 4책: 1815년 1825년 1824년, 5책: 1817년 1816년, 6책: 1832년 1830년 1831년)이며, 전근대시기 관(官)에서 발행한 책력 위에 해당 날에 맞추어 기록한 ‘역상일기’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이 가운데 6책은 표지 포함 190면 분량의 일기로서, 철이 된 순서는 임진력(壬辰曆; 1832), 경인력(庚寅曆; 1830), 신묘력(辛卯曆; 1831)의 순서로 되어 있고, 뒤에 계해력(癸亥曆; 1863), 임술력(壬戌曆; 1862), 신묘력(辛卯曆; 1891)이 합철되어 있다. 뒷 부분의 계해력과 임술력의 경우 저자가 밝힌 기제사의 월일로 미루어보면 이병탁의 증손자인 이민직의 일기인 것으로 판단된다. 마지막 신묘력은 등장인물들로 보면 이장규 또는 그의 종제인 이명규 대의 일기인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일기에는 대산 이상정(李象靖)이 손자에게 보낸 편지글과 권경회(權景晦)에게 보낸 편지글 및 일기 중간 중간에 작자가 직접 쓴 시와 성현들이 쓴 글을 필사하였으며 더러 자신이 쓴 편지글과 만사가 있다. 일기의 주 내용은 저자가 병으로 고생하여 자손들이 대구나 안동까지 가서 의원을 데리고 오거나 약방문을 처방받아 약을 먹는 것과 세상을 등진 친구들의 빈소를 찾아가 곡을 하는 것이며, 김정섭(金正燮)이란 자가 이 씨 집안 산소에 함부로 묘를 썼음에도 집안 식구가 모두 염병에 걸렸다는 식으로 온갖 핑계를 대며 파가지 않는데도 당시 의성 현감이 사실파악은 하지 않은 채 김정섭의 말만 듣고 강력한 처벌을 내리지 않는 것에 대해 한탄하고 있다. 역사적 사실로는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孝明世子, 1809~1830)의 국상이 났다는 사실인데, 이 사건을 통해 일기의 저작 연대를 알 수 있었다. 일기의 저자는, 일기에 조카 이수삼(李秀三)의 둘째아들 이응직(李應稷)을 이수담(李秀聃)의 양자로 보내는 안타까움을 표시한 내용과, 특히 저자가 자신의 나이를 ‘칠십을 넘기고 팔십을 바라보는 나이’ 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이응직의 종조부로 추정된다. 이응직의 종조부인 구옹(懼翁) 이병탁(李秉鐸)은 이 일기가 쓰인 당시 각각 약 71세, 72세, 73세였다. 따라서 이 일기는 이병탁의 일기로 추정된다. 이병탁은 본관은 한산, 자는 자목(子木), 호는 구옹이며, 부친은 면암(俛庵) 이우(李㙖), 조부는 소산(小山) 이광정(李光靖)이다. 주사손으로서 안동의 명문가 출신 유자의 한 사람이다. 비록 과거를 하지는 않았지만 학문적 소양을 갖춘 인격자였다. 이 점은 유자로서 평소 준행하는 여러 형태의 행례를 통하여 밝혀진 바이다. 이 일기는 빠짐없는 상세한 날씨 기록뿐만 아니라 19세기 안동지방 중소지주의 생활상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1차 사료로서 매우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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