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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넷 오류 신고 게시판입니다.
  예안광산김씨 자료중 김회 의 처는 안동노씨가 아니라 안강노씨 입니다,
  노영균 답변완료 2012.02.03 2325
예안광산김씨 자료중 김회 의 처는 안동노씨가 아니라 안강노씨 입니다,
확인후 수정 부탁합니다

이곳은 1973년 안동댐 건설 때 약 500년 세거(世居)하던 광산김씨(光山金氏) 예안파(禮安派)의 삶의 터전인 오천이 수몰케 되어 인근에 산재(散在)하여 있던 고 건축물 등 문화재들을 이곳에 옮겨 놓은 민속마을이다.
광산김씨(光山金氏)가 우리 지방에 정착(定着)하게 된 것은 고려 말 제용소감(濟用小監) 무(務)가 처음 안동으로 낙향하였는데(묘소: 안동 남선면 노림) 그의 아들 목청전직(穆淸殿直) 숭지(崇之, 묘소 : 府西 두솔원 마감곡) 손자 음성현감(陰城縣監) 회(淮, 묘소 : 선고 묘소 좌록 배위 安東盧氏 묘 풍천 도양)로 이어져서 소감의 증손 효로(孝盧, 1454~1534) 때 예안 오천에 정착하였던 것이다.
효로(孝盧)는 광산김씨보(光山金氏譜)에 의하면




안동의 뿌리 찾기
3. 문화유적 답사기
일행 약 80명이 처음 들린 곳은 오천군자리(烏川君子里)였다.

오천문화재단지(君子里)




이곳은 1973년 안동댐 건설 때 약 500년 세거(世居)하던 광산김씨(光山金氏) 예안파(禮安派)의 삶의 터전인 오천이 수몰케 되어 인근에 산재(散在)하여 있던 고 건축물 등 문화재들을 이곳에 옮겨 놓은 민속마을이다.
광산김씨(光山金氏)가 우리 지방에 정착(定着)하게 된 것은 고려 말 제용소감(濟用少監) 무(務)가 처음으로 안동으로 낙향하였는데(묘소 : 안동 남선면 노림) 그의 아들 목청전직(穆淸殿直) 숭지(崇之, 묘소 : 府西 두솔원 마감곡) 손자 음성현감(陰城縣監) 회(淮, 묘소 : 선고 묘소 좌록 배위 安東盧氏 묘 풍천 도양)으로 이어져서 소감의 증손 효로(孝盧, 1454-1534) 때 예안 오천에 정착하였던 것이다.
효로(孝盧)는 광산김씨보(光山金氏譜)에 의하면 경자(庚子, 성종11년, 1480)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여 조행(操行)이 탁이하여 천거되어 사현(仕顯)하려 할 때 무오사화(戊午士禍 : 연산4년, 1498)가 일어나서 사진(仕進)의 뜻을 버리고 안동 도양(道陽)에서 예안 오천리에 복거(卜居)하였다고 기록 되어있다. 『왕조실록(王朝實錄)』에서도 중종13년(1518) 3월에 경상감사 김안국(金安國)이 천거하면서 60이 넘어도 정력이 불쇠하여 직무를 감당할 만한 선비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뒤에 향현사(鄕賢祠)에 제향되었다. 늑정(櫟亭) 권시중(權是中)이 초고(草稿)한 『선성지(宣城志)』에 의하면 오천에 고려때 효자 황재(黃載)가 살고 있었는데 황재의 사위 김효지(金孝之, 김무의 장자)가 안동 풍산에서 이거하여 이곳에 살았고 효지가 무후(無后)하여 조카 간(澗)으로 뒤를 잇게 하였는데 간도 무후하여 종손(從孫) 효로가 시양(侍養)하기 위하여 계거(繼居)하게 되었다 한다. 어찌되었든 오천에 사는 모든 광산김씨는 생원 효로의 후손이며 많은 인재가 배출되어 안동 지방의 명문으로 손 꼽히고 있다.






네. 김회의 처는 안강노씨로 알고 있습니다.
다만 자료가 제공된 ˝안동의 뿌리찾기˝란 책자는 저희 한국국학진흥원에서 제작된 책자가 아니며,
저희들이 지방자치단체 및 문화원 등에서 책자를 온라인에 서비스하도록 허락을 받아 제공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희들이 책자의 내용을 임의로 수정할 수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책자의 저자 또는 저작관련 단체에서 요청이 있을 경우에 한해서 수정이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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