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넷
유교넷
유교넷 통합검색
검색 한자입력| 검색코너| 로그인| 마이페이지| 사이트맵| 도움말

오류신고게시판

Home > 참여광장 > 자유광장 > 오류신고게시판
문중관
유교소식
자유게시판
오류신고게시판
맛집추천
숙제도우미
FAQ
유교넷 오류 신고 게시판입니다.
  퇴계학맥도 내용 수정 & 인물 추가 요청 건
  장영수 접수중 2018.01.25 812
●퇴계학맥도 문화생 내용변경 및 추가 등록을 신청 합니다.
당초 : 장근(張謹) 潛溪. 榮州鹿洞 (1544~1619)
변경 : 장근(張謹) 潛齋. 醴泉 (1544~1619).

●추가등록 요청 자 : 장진(張溍) 鹿野. 榮州鹿洞 (1550~1640).ㅡㅡㅡㅡㅡㅡㅡㅡ장근(張謹)과 제종형제
1582년(선조 15)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 생원이 되었다.
비록 다소 늦은 나이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지만 당시 성균관의 동료선비들은 모두 그의 학문을 높이 평가하고 추중했다고 한다. 그 후 장진은 입신양명에 뜻을 두고 더욱 더 학문에 매진하였다. 하지만 그로부터 10년이 지났을 무렵 그의 삶에 전환점이라 할 수 있는 사건이 발생하였으니 바로 임진왜란이었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조정과 나라가 피폐해지자 그는 출세의 뜻을 버리고 임천(林泉)에 숨어 남은 생애를 은거하며 보내기로 결심하였다. 외가 고장인 영천으로 옮겨간 그는 고을 서쪽 배탄(杯呑)에 자리를 잡아 살면서 서재를 짓고 녹야당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지역이 훗날 녹동(鹿洞)이라 알려진 것도 그 때문이라 한다.
부용계는 영천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 문행을 갖춘 50여 명이 만든 친목 모임이었다.
이들 명현들은 1636년(인조14) 모임의 계책을 수정하여 방에 붙여 걸고자 하였다.
당시 그 자리에는 김영조(金榮祖)·박승무(朴檜茂)·홍익한(洪翼漢)·진상홍(秦尙弘) 등 쟁쟁한 명류들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 중 계책의 첫머리를 점한 사람은 장진이었다고 한다. 이렇듯 만인의 추앙을 받았던 장진은 90세가 되던 해 수직(壽職)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使)에 올랐다.
박승진(朴勝振)은 묘갈명에서 “비록 일세에 울릴만한 자질을 타고 났으나 시기를 타고 나지 못하여 그 재주를 조금도 펼치지 못하였다.” 라 기록하며 안타까운 심정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진상홍은 장진에 대한 만사(輓詞)에서 “바깥의 명리에 대한 뜻을 끊고 스스로 분수에 만족하며 도를 즐겼다.” 고 적고 있는데, 짧은 글이지만 장진의 일생을 압축하여 잘 표현해주고 있다.
교유인물은 유복기(柳復起), 이덕홍(李德弘) 비록 타관에서 영천으로 옮겨와 살았던 장진이었지만 어려서부터 독서를 통해 닦아온 학문과 행검이 알려지면서 당대의 명사들과 많은 교분을 쌓았다.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의 문인이면서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크게 활약한 기봉(岐峰) 유복기(柳復起)와 이황(李滉)이 매우 아끼던 제자였던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은 가장 친목이 두터운 사이였다. 특히 이황의 말년 제자이면서 학문으로 명성이 높았던 이덕홍이 장진의 이종사촌이었으니, 장진의 학문의 깊이 역시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한편,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안동 부사로 있으면서 이덕홍의 정자인 군자정(君子亭)에서 강회를 베풀 적에 장진은 이 모임에 영남의 명사들과 함께 참여하기도 하였다. 정구 역시 당대의 이름난 학자였으므로 그의 가르침은 장진이 학문적으로 성숙하는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카피라이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