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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기행 스크랩 게시판참여
기본정보 코스보기버튼
null 봉정사 화엄강당   
화엄강당은 주심포계 맞배지붕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1969년 해체·복원할 때 나타난 상량문에 의하면 1588년(선조21)에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차분하고 안정감 있게 지은 건물로 우리나라 전통 건축사에 귀중한 자료이다.
1967년 6월 23일 보물 제448호로 지정되었다.
도산서원 도산서원   
도산서원(陶山書院)은 본래 퇴계 이황이 도산서당을 짓고 유생을 교육하며 학문을 쌓던 곳으로 1574년(선조7) 그의 학덕을 추모하는 문인과 유생들이 상덕사(尙德祠: 보물 제211호)란 사당을 짓고 전교당(典敎堂: 보물 제210호), 동ㆍ서재를 지어 서원으로 완성하였다.
1575년(선조8) 사액서원이 되면서 영남지방 유학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이 서원이 가지는 역사 문화적 가치에 비해 건축물들은 전체적으로 일반 민가처럼 소박한 편인데, 이는 퇴계의 제자들이 퇴계의 검소한 품성과 인격을 받들어 서원 건립시 사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혹시 도산서원을 둘러보고 규모에 실망하는 사람이 있다면, 서원에 담겨있는 퇴계의 인품을 한 번 더 생각한 후, 안동선비처럼 고결한 눈으로 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리하면 도산서원은 태산처럼 크게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1969년 5월 28일 사적 170호로 지정되었다.
도산서원 전교당 전교당   
전교당은 조선 1574년(선조7)에 지은 것을 1969년에 보수한 것이며 규모는 전면 4칸, 측면 2칸이다.
지붕은 팔작지붕이고 온돌방과 대청마루로 이루어져 있다.
매우 간소하게 지은 건물로 선조가 서원에 내려준 ‘도산서원’이라는 현판 글씨는 명필 한석봉이 임금님 앞에서 쓴 글씨라고 전한다.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210호로 지정되었다.
도산서원 상덕사 상덕사 및 정문   
도산서원 제일 뒤쪽에 있는 상덕사는 퇴계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1574년(선조7)에 지었고 지금 있는 건물은 1969년 수리한 것이다.
규모는 전면 3칸, 측면 2칸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상덕사를 드나드는 정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 크기로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간결하고 매우 검소하게 지은 전통 깊은 조선시대 건축물로 잘 보존해야 할 문화재이다.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211호로 지정되었다.
봉암서원 병산서원   
병산서원(屛山書院)은 서애 류성룡의 학문과 업적을 기리기 위한 곳이다.
원래 풍악서당으로 풍산류씨 집안의 교육기관이었는데, 광해군 6년(1614)에 존덕사를 세워 류성룡의 위패를 봉안하였고, 철종 14년(1863) 임금으로부터 ‘병산’이라는 이름을 사액 받아 서원이 되었다.
병산서원은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은 전국 47개 서원 중 하나로도 유명하다.
지금도 만대루에 올라서면 초연이 흘러가는 낙동강과 그 강을 포근히 감싸 안은 병산이 서원과 한데 어우러져 시 한수 절로 나올 지경이니, 훼철되지 않고 보전되어 우리 마음에까지 그 감흥을 전해주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줄 모른다.
1978년 3월 31일 서원 전체가 사적 제260호로 지정되었다.
대구서씨 소호헌 소호헌   
소호헌은 조선 중종 때 문신인 함재 서해가 서재로 쓰기 위해 명종 때 지은 별당건물이다.
규모는 정면 4칸, 측면 2칸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왼쪽 3칸은 대청, 오른쪽 1칸은 누마루며 앞쪽으로 온돌방 2칸을 붙여 집의 구조가 ‘T’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기와에 새겨진 용 두 마리가 나는 문양은 민가에서 보기 드문 것이며, 건물에 나타나는 오래된 수법들은 조선시대 민가건축 연구에 소중한 자료이다.
1968년 12월 19일 보물 제475호로 지정되었다.
null 봉정사   
대한불교 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孤雲寺)의 말사로 672년(문무왕 12) 의상이 창건하였다. 의상이 영주 부석사에서 종이학을 접어 날리니 이곳에 내려앉았고 그 자리에 봉정사를 지었다는 전설이 전하고 있다.
경내에는 고려 말에 지어진 극락전(極樂殿)과 조선 초에 지어진 대웅전(大雄殿), 조선 중기에 지어진 고금당(古今堂), 화엄강당(華嚴講堂) 등 시대를 달리하는 목조건축물들이 한 곳에 자리 잡고 있어 ‘고건축 박물관’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각 건축물들의 특징을 살피고, 또 서로의 차이점들도 비교해 본다면 초보자라 할지라도 한국 고건축의 미학을 느끼게 될 것이다.
사찰이 주는 경건함과 고건축이 주는 단아함이 한데 어우러져 가히 안동관광의 백미라 할 수 있다.
null 봉정사 극락전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4칸의 단층 맞배지붕의 주심포집이다.
1972년 해체·수리할 때 발견된 묵서명(墨書銘)에 의하면 1368년에 옥개 부분을 중수하였다고 하는데, 중수는 보통 지어진 후 100~150년 주기로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로 미루어 건립연대는 최소한 그보다 100∼150년 정도 앞섰으리라 짐작된다.
따라서 이 건물은 통일신라시대 건축양식을 이어받은 고려시대의 건물로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목조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15호로 지정되었다.
null 봉정사 대웅전   
대웅전은 봉정사의 정전(正殿)으로 다포양식에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단층 팔작지붕이다.
기둥 사이의 창문이나 벽체 등 일부가 창건된 뒤 변경되었으나 골격은 전형적인 다포양식을 갖추었다. 건물 내부의 가구 형식이나 세부 기법에서도 외부와 같이 단조로우면서 견실한 공법이 초기의 다포 양식 특징을 잘 보여준다. 앞면 기둥 앞으로 툇마루를 깔았는데, 본전에 이와 같은 툇마루를 시설한 예로는 유일하다.
창건 때의 모습을 보여주는 내부 단청(丹靑)은 채색도 뛰어나며 고려의 요소를 지니고 있어 중요한 회화 자료이다.
1962년 일부 해체 수리 때 발견된 묵서명으로 보아 조선 초기의 건물로 추정되며,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55호로 지정되었다.
null 봉정사 고금당   
고금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원래는 맞배지붕이였으나 북쪽 측면은 훗날 팔작지붕으로 개조하였다.
공포는 기둥 위에만 배치된 주심포(柱心包)집 계통의 구성이다.
공포를 구성하는 첨차의 형태가 이미 조선 전기의 특색을 잃고 변형된 점으로 미루어 건립연대는 조선 중기에 속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1967년 6월 23일 보물 제449호로 지정되었다.
풍산류씨 양진당 하회양진당   
양진당은 하회마을 풍산류씨의 대종택으로 동생인 서애 류성룡(1542~1607)이 충효당으로 분파한 이후 형인 겸암 류운룡(1539~1601)을 불천위로 모시고 있다.
사랑채에는 ‘입암고택(立巖古宅)’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입암은 겸암과 서애의 아버지인 류중영(1515∼1573)의 호이다.
또한 안채의 대청마루에는 한석봉의 친필인 ‘양진당(養眞堂)’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는데, 양진당은 겸암의 6대손인 류영(1687~1761)의 어릴 적 이름(雅號)에서 따온 것으로 이때부터 이 집을 양진당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이 집은 전형적인 반가주택으로 그 중에서도 규모가 큰 편이다.
솟을대문 너머로 보이는 사랑채는 높은 기단 위에 자리 잡고 있어 그 자체만으로도 조선시대 양반의 위세를 느끼게 해 준다.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306호로 지정되었다.
풍산유씨 충효당 하회 충효당   
충효당은 조선 중기 이름난 문신이었던 서애 류성룡이 양진당에서 분가하며 지은 집으로 행랑채, 사랑채, 안채, 사당과 최근에 새로 지은 유물전시관인 영모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채에 걸려 있는 ‘충효당(忠孝堂)’ 현판은 미수 허목(1595∼1682)이 쓴 것이다.
비교적 지을 당시의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어 한옥의 고풍스런 멋이 한껏 품어 나오는데, 이러한 분위기는 마치 당장이라도 사랑채의 문을 열고 서애 선생이 불쑥 내다볼 것만 같아 관람객의 마음을 숙연하게 만들기도 한다.
양진당과 함께 하회마을을 대표하는 고건축으로 1964년 11월 14일 보물 제414호로 지정되었다.
도림강당 예안이씨 충효당   
이 건물은 예안이씨 16대손 근재공의 둘째 아들 이홍인(1528∼1594)의 종택이다.
이홍인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풍천에서 왜적과 싸우다 순국하였다. 이에 나라에서 정충각을 정려받았다. 또 그 9세손 이한오의 뛰어난 효행을 기려 정효각을 정려받았다. 이렇게 이 집에서 충신과 효자가 나왔다 하여 충효당(忠孝堂)이라 불리게 되었다.
본채는 소박하고 서민적이면서 반가의 주택구조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별당채인 쌍수당(雙修堂)은 안동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누각형 2층 건물로 그 규모가 위풍당당하여 본채와 대비되는 점이 특이하다.
1971년 8월 30일 보물 제553호로 지정되었다.
고성이씨 임청각 임청각과 군자정   
임청각(臨淸閣)은 영산현감을 지낸 이증이 안동 산수의 아름다움을 좋아하여 안동에 정착하면서 건립한 건물이다. 본래 임청각은 일반 사가에서 지을 수 있는 가장 큰 규모인 99칸의 대저택이었으나, 구한말 중앙선이 종택 앞으로 놓이면서 일제에 의해 강제 철거되었고, 그 결과 현재의 모습인 50여 칸만 남게 되었다.
또한 임청각의 기와가 적갈색인 것도 기차바퀴의 산화철 때문이라고 하니 일본의 포악함이 현재에까지 미치는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다.
임청각의 별당형 정자인 군자정(君子亭)은 증의 셋째 아들인 이명이 중종 때 건립한 것이다.
봉정사 극락전과 함께 임진왜란을 무사히 넘긴 안동의 오래된 목조건물중 하나로 그 역사적, 건축학적 가치가 매우 높은 건물이다. 또한 ‘임청각’이라는 당호는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따온 것으로 퇴계 이황(1501~1570)의 친필로 유명하다.
1963년 1월 21일 임청각과 군자정이 함께 보물 제182호로 지정되었다.
의성김씨 청계종택 청계종택   
청계종택(靑溪宗宅)은 내앞마을 의성김씨의 대종가로 청계는 학봉 김성일(1538∼1593)의 아버지인 김진(1500~1580)의 호이다.
지금 있는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 버린 것을 학봉이 북경에 사진으로 갔다가 구한 설계도를 갖고서 다시 지은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일반적인 영남의 ‘ㅁ’자형 반가주택과는 달리 행랑채와 사랑채, 안채가 모두 연결되어 있는 특이한 구성으로 평면이 ‘巳’자 모양을 하고 있다.
행랑채가 안채와 붙어 있으면서도 안채로 통하는 문은 나 있지 않은데, 이는 행랑채에 머무는 사람들이 안채로 통할 수 없게 한 것으로 당시의 남녀유별, 내외구분 사상을 건물구성에서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1967년 6월 23일 보물 제450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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