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와 소산마을
3. 김영수

한성판관 김계권의 아들이다. 아버지가 서울에 생활할 때 한양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말이 적고 몸가짐이 의젓하였다. 13세 되던 해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를 따라 고향인 소산에 돌아와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된다.
그는 팔척장신의 훤칠한 키에 수염이 길고 아름다워 풍채가 당당했으며, 너그럽고 굳센 성품에 다양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글공부는 그리 많이 하지 않았으나 글과 언변에 능했으며, 말타기, 활쏘기, 바둑, 음률에 모두 능했고, 글씨 또한 힘이 있고 수려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약관에 무예를 익혀 한 차례 과거를 보았으나 합격되지 못하였다. 그래서 음서(蔭敍)로 군직에 나아가 의금부 도사가 되었다. 이때 옥사(獄辭)를 처리하는 것이 물 흐르듯 하여 공이 옥사 공첩을 갖추어 당상에 울리면 ‘이는 김영수 공의 공첩이라 살필 것도 없다’ 면서 그대로 처리했다고 한다. 그때 당시 노사신(盧思愼)이 판사로 홍응(洪応)이 지사였는데 공에 대한 신뢰가 그만큼이나 두터웠던 것이다.
그 뒤에 사헌부 감찰을 지내다가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외직을 청했다. 그래서 상주 판관에 부임하게 되었는데 재임 3년에 많은 치적을 남겨 향민들로부터 칭송을 들었다. 그리고 지방관리를 그만두고 2년 간 고향에서 노모를 모시며 농사를 짓다가 나라의 부름을 받아 다시 의금부도사 중추부도사 등을 지내게 된다. 그러나 고향에 계시는 노모를 생각하여 다시 외직을 구하여 영덕 현령으로 부임했다.
영덕은 동해에 접하여 한양과 멀어 실제로 정치력이 미치기 어려운 곳이었다. 그래서 지방의 양반과 아전들이 행패가 심해서 중앙의 관리가 파견되더라도 아전들의 다루기가 매우 힘이 들었다고 한다. 공이 영덕 현령으로 부임을 하였을 때도 아전들은 오만하여 현령에 대한 예의가 없었으며 백성들을 자신들 마음대로 부렸다. 백성들은 현령의 말보다 아전의 말을 따르기 바빠 공의 명령을 좇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힘보다는 마음으로 그들을 달래기로 하고 한결같이 청렴하게 하고 사적인 일보다는 공적인 일을 먼저 행함으로서 향민이 점점 믿고 따르게 되었다. 특히 아전의 잘못을 엄히 다스리고 어려운 백성들을 돌봐 주어 위엄과 은혜를 함께 베풀었다.
백성들에게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향교를 새롭게 수리하여 마을의 글 읽은 청년들을 모아 공부시키는 한편 마을에도 서당을 설치하여 기초 학문을 일으키고 교학에 힘을 기울였다. 이것을 본 아전이나 향리의 사람들도 스스로 다스림에 따르게 되니 고을의 모습이 날로 새로워졌다.
성종 17년(1486) 영남 일대에 보기 드문 흉년이 들어 고을마다 굶주리는 사람이 늘고 길가에는 시체가 즐비하게 되었다. 심지어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처참한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공은 끼니를 걸러가며 경내를 매일 돌면서 굶는 사람을 정성껏 보살피며 구호한 결과 사람들이 서로 도와 어려운 흉년을 무사히 넘겼다. 중앙에서 흉년의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내려온 진휼사가 영덕에 들러보니 어려운 상황에도 백성들이 서로 위로하고 어려움을 함께 나누고 있음을 보고 조정에 알리기 되었다. 조정에서는 공의 치적을 인정하여 벼슬 품계를 올려 포상했다고 한다. 공이 임기가 다되어 떠나게 되자 평소에 미워하고 따르지 않던 아전들이 이제는 이별을 아쉬워하며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며 이별을 슬퍼했다고 한다.
내직으로 불려 선공감첨정, 사헌부장령, 사옹원첨정, 상의원첨정, 통례원봉례 등을 거쳤다. 그는 다시 고향에 가까운 외직을 원하여 영천에 군수로 부임하게 된다. 그러나 부임하여 얼마 되지 않아 벼슬자리를 청산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소산에 정착한다. 그는 5형제 중 막내였다. 맏형 학조는 출가하여 세조의 국사(國師)로 일하고 있었고, 다른 형들도 벼슬에 나아가 있어 집안의 큰일은 대부분 공이 맡아 처리하고 이끌어 가야 했다.
이때 공의 나이 40무렵으로 어지럽고 시끄러운 벼슬길을 청산하고 향리에서 어머니를 봉양하며 조용히 여생을 즐기려 했던 것 같다. 80이 넘은 노모를 위하여 삼구정을 지은 것이 이 무렵이었다. 마을 동쪽에 마치 목이 긴 병 모양의 동오봉이 있다. 뒤에는 저 멀리 학가산이 우뚝하게 솟아있고 나지막한 산들이 오밀조밀 둘려 있고 그 앞에는 동남쪽으로 풍산 들이 넓게 벌려 있고 낙동강이 동서로 굽이쳐 흐르니 풍광이 더욱 좋았다. 형들과 뜻을 모아 그 동오봉 위에 작지만 아담하고 보기 좋은 정자를 마련하고 그 이름을 삼구정(三龜亭)이라 했다. 마침 정자 옆에 거북이 엎드려 있는 모양을 한 바위 세 덩이가 있어 이름지어진 것이다. 또한 거북은 장수하는 동물로 어머니의 무병장수를 비는 뜻도 함께 담고 있다. 때가 좋은 화창한 봄날이면 날을 받아 노모를 가마에 태워와 정자에 동네 노인들과 함께 모셔놓고 잔치를 벌렸다고 한다. 푸짐하게 음식과 알맞은 풍악을 준비하고 형제자매가 모두 모여 색동옷 차림으로 재롱을 보이니 주위의 사람들이 그 효성과 영화스러움을 부러워하였고 지나는 길손들도 찬탄했다고 전하고 있다.
성품은 온후하였지만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근엄함을 지녔고, 아무리 어리석거나 미천한 사람에게도 거만함이 없어 사람들이 그를 잘 따랐다. 오랜 세월 벼슬에 있으면서도 향토를 위한 사업에 힘을 기울였다. 봄가을이면 향사당(鄕射堂)에 연세많으신 어른들을 모아 향사례(鄕射禮)를 행함으로써 지방의 미풍양속을 넓히는데 이바지했다.
연산군 2년(1496)모친상을 당하여 정성을 다해 3년 상을 마치고, 연산군 5년(1499) 금교도찰방에 임명되었다. 금교역은 서울에서 신의주로 가는 중간에 개성에서 황주 사이에 있는 역으로 금교도(金郊道)의 중심역이었다. 황해도 역도 중 가장 중요한 중로(中路)ㆍ중역(中驛)을 관장한 역도이다. 역로는 개성→금천(金川)→평산(平山)→서흥(瑞興)→봉산(鳳山)→황주로 이어지는 길이다. 소속역으로는 중심역인 금천의 금교역 외에 금천의 흥의(興義), 평산의 금암(金巖)ㆍ보산(寶山)ㆍ안성(安城), 서흥의 용천(龍泉), 봉산의 검수(劒水)ㆍ동선(洞仙)ㆍ소관(所串), 황주의 경천(敬天)ㆍ단림(丹林) 등 10개 역이다.
금교역(金郊驛)은 황해도와 평안도를 잊는 길목으로 관원들의 발길이 잦은 곳이다. 특히 명나라에 사신들이 드나드는 곳으로 정조사(正朝使), 성절사(聖節使), 천추사(千秋使) 등 해마다 세네 차례씩 사신행차를 맞아 치를 때마다 자재와 화물을 감당할 비용이 감당하기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리고 황해도와 평안도를 지나는 관원과 무장이 지날 때마다 그들의 요구 만만찮은 곳이었다.
관원들은 ‘나라에 바칠 공물이라’이라고 거짓 핑계를 되어 개인의 많은 화물을 수송하기 위해 국가의 역마를 함부로 징발하고 개인의 사비까지 요구하는 부조리가 공공연히 자행되었다. 또한 무장(武將)들은 해마다 교체될 때 이곳 금교역을 지나면서 말먹이와 식량을 준비하여 줄 것을 요구했다. 이와 같은 폐단은 정례화 되었기 때문에 하급 관리로서 어떠할 방도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상급 기관도 그를 단속하지 못하여 폐단은 그대로 굳어져 왔던 것이다.
공은 관리와 무장들이 나라에서 충분한 녹봉을 받으면서도 역졸들에게 엉뚱한 트집을 잡아 협박하고 폭행을 일삼는 고질적 폐단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어려움을 견디다 못한 역졸들이 몰래 도망을 치는데 있었다. 나라의 위급한 일을 전달하해야 하는 중요한 임무를 담당하는 역졸이 도망을 간다는 것은 국가적인 정보망에 허점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부임하는 즉시 이러한 폐단을 씻어 버리기 위하여 관하의 여러 역에 공문을 보내어 ‘지나가는 상급 관원이 역리에게 법에 어긋나는 행위를 자행하거나 요구를 했을 경우엔 어떠한 신분이든 즉시 보고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법을 어긴 관원 있어 철저한 진상 조사와 증거를 확보하여 상급 관원 몇 사람을 조정에 보고하여 처단케 했다. 그 뒤부터 지나는 관원은 공을 두려워하여 역졸들을 괴롭히는 폐단이 사라졌다고 한다. 또 황해도 일대는 바닷가이면서도 산악지대가 많아 산림이 울창했다. 울창한 숲에는 온갖 짐승들이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천해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이곳에는 이속이나 찰방들이 사냥을 즐기는 것을 좋아했다. 이들은 사냥에 재미를 붙이다 보니 자연히 공무를 멀리하게 되었다. 그리고 역졸을 앞세워 산짐승몰이를 시키고 역리들이 개인의 사욕을 챙기는 폐단이 많아 공이 관리를 엄격히 하고 잘못이 적발되면 즉시 파면하니 모든 폐단이 사라지게 되었다.
이 해에 큰비가 내려 한해로 흉년이 들어 찾아오는 손님을 대접할 공용 양식이 모자라게 되었다. 그래서 호조에 공문서를 보내어 어려움을 보고하여 콩 3백석과 소금 1백석을 받아 공정하게 집행하니 어려움을 이겨냈다. 공이 관할하고 있는 금교도는 하는 일은 많으나 국가에서 내리는 지원은 오히려 다른 지역에 비해 적으니 일하기가 어려웠다. 예를 들면 가까운 평양 근교에 있는 대동도(大東道)에는 3호(戶) 당 말 한 필, 1참(站:한 역)마다 말이 50필이나 되어 말이 많으므로 사람이 일하기가 수월했는데, 금교도(金郊道)에는 10호에 말 한 필이 지급되었고 1참에는 겨우 그 반절인 25필이 적용되었다. 그래서 항상 말이 적어 사람들이 할 일이 많아 고달팠으며 잦은 흉년과 역병으로 민생의 시달림이 심했다. 그리고 관사가 비좁고 허술하여 중국사신이나 높은 관원이 올 때마다 접대가 곤란한 형편이었다. 이를 관찰사에게 소상이 보고하여 조직은 대동도와 같이 하고 관사를 새로 개청하니 일하기가 한층 수월했다. 그러자 자연히 금교도에서 관할하는 역의 역리들은 맡은 책임을 다하게 되었고 다른 역과는 차별되는 모범이 되었다.
관찰사는 이러한 그의 능력을 인정하여 황해도 연안에 나는 소금 생산을 맡아 관리하게 했다. 그러나 이 지역은 풍토가 습하여 전염병이 많은 곳으로 연산군 8년(1502)에 모진 역병이 돌기 시작했다. 그 해 7월에 그는 역병으로 세상을 떠나니 나이 57세였다. 그 죽음의 소식을 들은 그 고장 사람들은 모두 슬퍼했으며 서울로 운구해 오는 동안 지나는 고을마다에서 노제를 성대히 치렀다고 전하고 있다. 조정에서도 공의 공적을 높이 평가하고 쌀 10석과 종이 20권을 내리고 예관을 특별히 보내어 제사케 했다. 그 이듬해 3월 고향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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