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와 소산마을
1. 소산의 집

1) 삼소재(三素齋, 민속자료 제66호)
선안동(先安東), 상락김씨(上洛金氏) 시조의 18대손 김용추(金用秋, 1651~1711)가 처가인 진성이씨의 재력으로 1674년경에 지었다고 하는 집이다. 당호는 용추의 5대손으로 정조 때 통정대부 및 행용양위부호군(行龍驤衛副護軍)을 지낸 영락(英洛, 1796~1875)의 호에서 비롯되었다.



소산 기슭에 자리 잡은 동향집으로 ‘ㅁ’자형 정침과 북쪽에 사당을 갖추고 있다. 정침을 구성한 ‘ㅁ’자형은 5칸 규모이지만 사랑채 부분이 북쪽으로 1칸을 내밀고 있어 정면은 6칸이다. 중문 오른쪽에 있는 사랑채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 크기인데, 정면에 두리기둥을 세우고 반 칸 폭의 툇마루를 두었다. 사랑채에는 사랑방 1칸 반과 사랑마루를 1칸 반 두어 툇마루와 연결시켰다. 그리고 사랑방과 마루가 연결되는 뒷쪽에 책방을 두어 안마당으로 통하게 하였다. 중문 왼쪽으로는 마구간과 부엌이 안방 쪽으로 길게 놓여 있다.


삼소재 평면도


안대청의 오른쪽 뒤쪽에 뒷방이 한 칸 있고, 그 앞에 부엌과 사이에 통간 안방이 놓여 있다. 이 방들의 남쪽면 각 칸에는 외여닫이 세살창문들을 달아 밝은 볕을 들이고 있다.
사당은 전퇴가 있는 3칸 규모의 맞배지붕 집이다. 동쪽으로 놓여진 주택의 방 배치와 채광관계를 살펴 볼 수 있는 좋은 대상이기도 하다.

2) 비안공 구택(比安公 舊宅, 문화재자료 제211호)

돈소당 현판

세종 때 비안현감을 지낸 김삼근(金三近, 비안공(比安公), 1419~1465)의 고택이다. 그는 군내 풍산현 남불정촌에 살았으나 둘째 아들 계행(係行, 1431~1521)이 출생한 후 소산리로 옮겨와서 살았으므로 이 무렵에 이 집을 처음 지은 것으로 보인다. 정면에는 돈소당(敦素堂)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것은 감찰공 영전의 9대손 언행(彦行)의 호를 따라서 부르던 집 이름이다.
소요산 기슭에 남쪽을 향해 터를 잡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ㅁ’자형의 집이다.

비안공구택 평면도

정면은 대문칸의 오른쪽에 마구간이 있고, 좌측에는 사랑방 2칸과 사랑마루방 1칸으로 되어 있으며 이 마루방 뒷쪽의 모방까지 합해서 사랑채 부분은 4칸으로 되어 있다. 안방과 안대청은 각각 칸반 규모로 좌ㆍ우로 놓여져 있고, 안방의 왼쪽의 긴 부엌은 사랑채의 모방 뒷벽과 닿았다. 안대청의 왼쪽에는 상방 1칸이 있고, 그 앞에 부엌 1칸, 뒤주 1칸이 마구간에 이어져 있다.
기둥은 각주로 자연석 초석 위에 세웠고, 사당은 집의 오른쪽 언덕 위에 남향으로 세워져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이다. 사당 양옆은 고정 광창으로 격자살 짜임으로 되어 있다.




3) 묵재고택(黙齋古宅, 민속자료 제85호)


묵재 현판



소유자의 선조들이 수대에 걸쳐서 살았지만 언제 누가 지었는지는 기록으로 전하지 않는 집이다.

묵재고택 평면도

소요산 기슭에 터를 잡아 동서쪽으로 배치되어 있다. 몸채는 ‘H’자 평면이며 그 앞에 ‘一’자 행랑채가 놓여져 튼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몸채의 중앙부는 2칸으로 왼쪽 1칸은 온돌방이고 오른쪽 1칸은 안대청이다. 안방의 왼쪽에는 3칸이 넘는 장방형의 부엌이 있고, 그 앞에 온돌방 1칸을 만들어 몸채의 왼쪽 부분을 이루고 있고, 안대청의 오른쪽에는 좁은 통로마루를 가운데 두고 뒷편으로는 도장방 1칸이 놓였고, 앞쪽으로는 통칸 온돌ㆍ사랑방이 배치되어 오른쪽 부분을 이룬다. 이와 같이 몸채에 사랑채 부분이 포함된 평면구성은 이 마을의 동야고택(東埜古宅)과 같은 형식을 보이고 있지만 묵재고택이 사랑방 뒤쪽에 있는 도장방의 배치나 행랑채의 구성들로 보아 더 오래된 형식인 것으로 생각된다.




4) 안동김씨 종택(安東金氏 宗宅, 민속자료 제25호)


양소당 현판


성종 때 명신 양소당(養素堂) 김영수(金永銖, 1446~1502)가 지었다고 전하는 집이다. 소산 마을 뒤쪽 야산을 배경으로 남서쪽으로 자리하고 있다. 대문이 없으며 사랑채ㆍ중문간채ㆍ안채로 구성된 ‘ㅁ’자형 몸채가 자리잡고 그 오른쪽 뒤편에 사당이 배치되어 있다. 몸채 왼편과 뒤편에 담을 쌓아 안채에서만 이용할 수 있는 독립된 외부공간을 마련하였다.


안동 김씨 종택(양소당) 평면도



양소당 사랑채 뒤편 굴뚝

사랑채는 2칸 사랑방과 전체 ‘ㅁ’자형에서 튀어나온 2칸 통 사랑대청이 있고 사랑방 뒷편으로는 작은 수장공간과 2칸의 방이 붙어 있다. 사랑채 앞으로는 툇마루가 있고 사랑대청 오른쪽부터 사랑채 뒤의 2칸 방까지는 쪽마루를 만들어 모든 공간들이 연결되게 하였다.
사랑방 뒤편 수장공간 왼쪽에는 사랑방에서 안채로 출입할 수 있는 통로를 마련했다. 2칸 짜리 방은 내외구분에 따라 안마당 쪽을 벽으로 막았다.


양소당 전경


사랑대청 앞에는 4분합 들문을 달아 공간을 보다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사랑방과 사랑대청 사이의 들문은 불발기로 꾸며져 있고, 전면 들문 위에는 조선 후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고창이 나 있다.
겹집으로 된 안채의 본채는 2칸의 안방과 안대청이 있고, 안방 앞에는 툇마루를 만들고 뒤에는 네 짝 미닫이문을 단 벽장을 두었다. 보통 안방에는 부엌 위에 다락을 두기 때문에 벽장을 설치하지 않거나, 벽장을 만들 경우 밖으로 튀어나온 한 칸 폭 벽장을 두는데 이 집은 방안에 두 칸 짜리로 넓게 마련했다. 안방 왼쪽에 2칸 반 규모의 부엌이 있고 그 앞에 옆뜰로 통하는 중문간이 사랑채 부속방에 붙어 있다. 안대청 옆에 다락을 둔 고방이 놓인 형식은 대개 이 지역에서 나타나는 유형이다.



사랑채와 안채는 홑처마 팔작지붕 집이다. 사랑대청 전면에만 다른 기둥보다 높은 둥근 기둥을 사용하였다. 사당은 전면에만 둥근 기둥을 세운 홑처마 맞배지붕 집으로 앞쪽에 마루가 깔려 있다.


5) 동야고택(東埜古宅, 문화재자료 제193호)


동야고택 현판

안동김씨 19대 손인 김중안(金重安, 1639~1705)이 지었다고 하나 건축연대가 확실하지 않은 집이다. 동야(東埜) 김양근(金養根, 1734~1799)이 이 집에서 태어났다. 그는 영조 때 증광문과에 급제한 뒤 어전의 면시(面試)에서 답안에 공자가어(孔子家語)의 ‘노인동야필사(魯人東埜畢事)’를 인용하였는데, 임금이 “동야선달은 어디 있나”라고 부르면서 시권을 외우라고 명한 것을 기념하고자 호를 동야라고 하였고, 이로 인해 이 집의 이름이 되었다.



소요산 기슭에 동남 방향으로 터를 잡았다. ‘一’자형 사랑채와 뒤에 ‘ㄷ’자형 안채가 튼 ‘ㅁ’자형 배치를 이루고 있다. ‘一’자형 사랑채는 5칸으로 원래는 초가 지붕이었다고 한다. 막돌 덤벙주초에 각주를 세웠다. 왼쪽에서부터 앞면과 옆면이 개방된 마루 1칸에 이어 큰방이 있는데 이 곳은 서당 또는 야학을 하던 곳이라 한다. 이 옆으로 마구간, 방앗간, 행랑방이 잇달아 붙어 있다.

동야고택 사랑채의 들문

동야고택 사랑채 마루의 굴뚝

안채는 막돌로 쌓은 높은 기단 위에 각주를 세웠다. 전체 4칸 가운데 왼쪽 2칸이 안대청이고 오른쪽 2칸은 좁은 툇마루가 있는 통칸 온돌방이다. 안방 오른쪽으로는 부엌ㆍ고방과 뒤주를 달아내었고, 대청의 왼쪽으로는 건너방과 그 앞쪽으로 통래칸을 건너 사랑방과 사랑마루방을 배치하였다. 특히 사랑마루방은 안마당 쪽으로는 벽채로 차단하였고 외부 앞쪽과 옆쪽으로 양개판문을 설치하여 드나들게 하였는데, 안동지방에서는 튼 ‘ㅁ’자 주택의 ‘ㄷ’자형 정침에 사랑채의 기능을 포함시킨 예는 흔하지 않다.

6) 청원루(淸遠樓, 유형문화재 제199호)


청원루 현판

조선 중종 때 평양서윤을 지낸 김번(金璠, 1479~1544)이 여생을 보내기 위해 지은 것이다. 병자호란 당시 인조의 굴욕적인 강화에 반대한 척화주전론의 거두였으며 예조판서였던 김상헌(金尙憲)이 청나라에 끌려갔다가 돌아온 후 1643년(인조 21)에 중건하고 청나라를 멀리 한다는 의미로 당호를 붙였다고 한다.


청원루 전경


왼쪽과 오른쪽의 날개 부분을 2층으로 만들고, 몸채 부분은 기단을 높게 쌓은 후 1층으로 만든 다락집 형상의 ‘ㄷ’자형 평면을 취하고 있다.

층을 이룬 청원루 마루(위‧아래)

몸채는 대청을 중앙에 두고 양 퇴칸에 온돌방을 마련하였으며 특히 대청 앞쪽을 2자 정도 폭으로 한단 낮게 하여 마루를 2단으로 만든 점이 눈에 띤다. 좌ㆍ우의 2층 누마루는 안쪽으로는 풍혈을 둔 난간을 세워 개방시키고 정면과 바깥쪽은 판벽에 판장문을 달아 폐쇄시켰으며 누하부 전면칸에 곳간을 두고 뒤쪽은 아궁이를 설치하였다.
중층과 단층을 합성한 평면구성과 세부기법이 주목된다.


이층누각 모양의 청원루



청원루 평면도(▲), 청원루 동쪽방 벽면(우▲), 서쪽방 벽면(우▼)



7) 삼구정(三龜亭, 유형문화재 제213호)


삼구정 현판(위)과
거북이 모양의 고인돌 3개(아래)

안동김씨 소산 입향조의 11세손 김영전(金永銓, 1439~1522)이 지례 현감으로 있을 때 88세 노모인 예천 권씨를 즐겁게 하려는 효심에서 그의 아우 영추, 영수와 함께 1495년(연산군 원년)에 건립한 정자이다. 건물의 이름은 이곳에 거북이 모양의 돌이 3개가 있어 붙인 것이다. 거북이는 십장생 중의 하나인데 자기 어머니가 거북이처럼 오래 살기를 기원하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1947년에 대대적으로 보수하였다.
이 정자는 동오(東吳)라 부르는 높이 2m 가량 되는 봉우리의 머리에 앉았는데 북쪽으로는 좀 거리를 두고 학가산이 있고 동서남의 세 방향으로는 큰 들이 있어 전망이 시원하게 트여 있다. 남쪽에는 곡강이라고 부르는 낙동강의 지류가 흐르고 있다. 정자의 토석담 밖에는 오래된 느티나무와 소나무들이 둘러 서 있어서 더욱 운치를 돋우고 있다.
서쪽 담으로 난 일각대문을 들어서면 정자가 있고, 그 앞 왼편으로 거북이 모양의 바위가 세 개 있다. 비교적 큰 잡석으로 기단을 쌓았고 초석을 자연석을 이용했으나 두 군데에 탑의 옥개석이 사용되고 있다.


탑의 옥개석으로 만든 주추(위)
연꽃무늬의 주춧돌(아래)


정면 3칸, 측면 2칸의 전부를 우물마루로 시설하였다. 네 모서리의 추녀 밑에서 활주를 세워 지지하였고 서편 사래 끝에는 용두로 된 토수가 1개 끼워져 있다.



다른 정자와는 달리 늙은 부모를 기쁘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어진 정자라는 점이 특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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