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의 명현당호
養素堂


1. 위치:安東市 豊山邑 素山 1里 218番地
양소당이 자리잡고 있는 소산리는 안동에서 34번 국도를 따라 예천방면으로 간다. 풍산읍 사무소가 있는 안교리를 지나 이 곳에서 하회마을로 가는 지방도와 교차되는 네거리에서 좌회전하여 넓은 풍산들을 바라 보며 500m 정도 달리면 다리가 놓여 있다. 이 다리를 건너면 오른편으로 소나무에 둘러 쌓여 있는 삼구정을 볼 수 있고, 나지막한 산을 등지고 200여 호쯤 됨직한 큰 동네를 만날 수 있는데 여기가 바로 안동 김씨들의 집성촌인 소산리이다. 이 마을로 들어서면 한 눈에 여기저기 이끼 낀 기와를 얹은 건축물들이 눈에 들어와 예사롭지 않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영가지의 방리(坊里)편에 보면 소산의 옛 지명은 금산촌(金山村)이다(金山村 在縣 西五里許 南臨大野 土地沃饒 百穀皆宜). 그러나 병자호란 때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선생이 낙향하여 은거할 때 김씨가 모여 사는 마을의 이름이 금산촌이라 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하여 소산으로 고쳤다고 전한다. 마을을 감싸고 있는 산이 소요산(素耀山)인데 이 산의 이름을 따서 소산이라 하였다. 깨끗하고 희고, 빛나는 산에 둘러싸인 마을이란 뜻을 간직하고 있다. 마을에서 구전되어 오는 말로는 소요산의 형상이 마치 소가 누워 있는 모양과 같다고 해서 싀미라고도 하고, 또 금산촌은 화려한 이름이니 청빈하고 검소한 삶을 갈망한 청음 선생이 고쳐지었다고도 전한다.

2. 堂號의 由來
성종 때의 명신(名臣)인 양소당(養素堂) 김영수(金永銖) 공의 호를 따서 붙였다. 선생은 한성판관을 지낸 아버지 계권(係權)과 예문관 대제학 맹(孟)의 손녀인 어머니 안동 권씨 사이에 한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 과묵하고 몸가짐이 의젓하였으며 굳센 성품에 다양한 재능을 지녀 서사(書辭)에 능했다. 13세에 부친상을 당하자 어머니를 따라 소산에 내려와 자랐다. 효행이 남달라 노모를 극진히 봉양하였으며, 평소에 청백하고 맑고 깨끗함을 기르라는 뜻에서 양소당이라 호를 지었다.

3. 建築物의 構成과 配置
이 건물은 양소당 김영수의 종택이다. 입구에 있는 마을회관에서 골목 깊숙한 곳인 소요산 자락 넓은 터에 자리잡고 있다. 다듬돌로 높게 축대를 쌓아 터를 고른 다음 정침을 앉히고 정침의 동쪽에 사당채를 배치하였다. 정침은 전면에 중문을 내고 좌우에 문간채와 사랑채를 배치하고 뒷면에 안채를 앉힌 다음 좌우에 익사를 연결하여 ㅁ자형의 평면을 구성하였다. 지붕은 팔작지붕이고 처마는 홑처마이다.

사랑채는 팔작지붕에 홑처마를 한 굴도리집이다. 다듬돌 바른층쌓기로 높는 죽담을 쌓고 자연석 주초석을 올려 기둥을 세웠다. 사랑채는 문간채의 기단보다 높게 꾸미고 기둥을 높게 하여 덩그렇게 솟아 있어 건축물의 품격을 높였다. 사랑채의 구성은 사랑방과 사랑마루로 되어 있다. 사랑방은 중문에 잇대어 2칸 통으로 배치하였고 오른편으로 2칸 크기의 사랑마루를 깔았다. 방과 마루 앞으로 반 칸의 퇴를 내어 툇마루를 설치하여 사랑채 공간으로 출입이 용이하도록 배려하였다.
기둥은 전면에는 원주를 사용하여 품격을 높였고 뒤는 각주를 사용했다. 사랑방에는 머름을 올리고 세살문의 쌍여닫이와 미닫이문을 달았으며 사랑마루에는 전면으로 궁판이 있는 세살문의 4분합문을 달아 말굽형의 들쇠에 들어올릴 수 있게 하였다. 측면과 뒷면 벽에는 하방에서 중방까지 판벽을 대고 바라지창을 달았으며 중방 위는 흙벽으로 마감했다. 사랑마루의 우측면에서 우 익사 작은 사랑방의 뒷면까지 쪽마루를 내어 이동에 불편이 없도록 배치하였으나 쪽마루에 난간을 돌리지는 않았다. 사랑방과 사랑마루를 경계짓는 곳에는 4분합문을 설치하여 필요할 때에 여닫을 수 있도록 하였다. 전면의 툇마루와 사랑마루는 모두 우물마루를 깔았고 천장은 연등천장이다. 사랑마루는 제례 시에 제청으로 활용한다.
중문은 국화문과 지네발형의 장석을 단 판문으로 안으로 여닫을 수 있도록 하였다. 문간채는 자연석을 다듬은 돌로 기단을 쌓고 자연석 주초석을 올려 기둥을 세웠다. 문간채는 정면이 4칸 측면 1칸의 규모이다. 평면의 구성은 중문이 1칸이고 중문의 오른편에 아궁이가 설치된 반 칸의 부엌이 배치되고, 왼편으로 한 칸 반의 곳간과 1칸의 문간방이 잇대어 있다. 곳간에는 전면으로 판벽으로 막고 미닫이 판문을 달았다.
중문을 열고 안채로 들어서면 반듯한 장방형의 안마당으로 이어지고 다듬돌 바른층쌓기로 높게 쌓은 죽담 위에 안채의 정침이 우뚝 솟아 있다. 안채의 평면구성은 왼편에서부터 1칸의 부엌, 2칸의 안방, 2칸의 대청, 1칸의 상방으로 배치되어 전체적으로 정면이 6칸이고 측면은 2칸의 크기이다. 안방은 2칸 통으로 측면은 1칸 반이다. 안방 앞에 반 칸의 마루를 깔아 전체평면은 2칸의 규모이다.
안방 위에는 공루를 설치하여 지붕의 높이가 상당히 올라갔다. 대청은 우물마루를 깔고 뒷면의 벽에는 흙벽으로 마감한 후 바라지창을 달았다. 대청에서 안방과 상방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문을 냈다. 천장은 연등천장이고 대청의 앞 기둥과 기둥에 선반을 설치하였다. 부엌과 상방의 위에도 다락을 설치하여 여러 가지 살림도구를 보관할 수 있도록 꾸몄다. 상방은 2칸 통의 크기로 우측면에 쌍여닫이문을 달고 앞에 쪽마루를 내어 출입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불발기창도 달았다.
좌‧우 익사는 맞배지붕의 형태를 갖추고 안채와 문간채, 안채와 사랑채의 사랑방과 연결되어 있다. 규모는 3칸 반의 크기이다. 좌 익사는 부엌과 광이 배치되어 수장공간으로 사용하고, 우 익사는 사당으로 나갈 수 있는 판문과 작은 사랑방으로 꾸며져 있다.
양소당에는 2곳의 변소가 마련되어 있는데 모두 맞배지붕에 기와를 얹었다. 하나는 안채의 부엌을 통하여 이용할 수 있고, 다른 하나는 사랑채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낮은 곳에 있다. 내부에는 마루를 깔고 ‘ㅗ’자형의 칸막이를 설치하여 양쪽에 구멍을 파 놓았다.
사당은 정침의 동쪽에 세웠다. 건축양식은 맞배지붕에 풍판을 단 굴도리집이다. 정면 3칸 측면에 반 칸의 퇴를 내어 2칸의 크기이다. 다듬돌 바른층쌓기의 기단에 장대석으로 마감하고 주초석을 놓았다. 기둥은 전면에 원주를 쓰고 나머지는 평주를 썼다. 사당의 각 칸에는 문을 달았는데 어칸에는 쌍여닫이 판문을 좌‧우 협칸에는 외문을 달아 제사가 있을 때에 출입을 한다. 사당의 내부에는 우물마루를 깔고 교의를 놓고 그 위에 신주가 모셔져 있는 혼독을 놓았다. 교의 앞에는 제상이 놓여져 있고 제상 앞에 향상이 놓여 있다. 교의, 제상, 향상은 4대 봉사로 모두 마련되어 있다.

4. 關聯人物
가. 김영수(金永銖, 1446~1502)
김영수의 자는 적옹(積翁)이며 호는 양소당(養素堂)이다. 태사(太師) 김선평(金宣平)의 후손으로 사헌부의 장령을 지냈다. 아버지는 한성판관을 지낸 계권(係權)이며 어머니는 안동 권씨로 예문관 대제학 맹(孟)의 손녀이다.
공은 약관의 나이에 무예를 익혀 군직에 음보(蔭補) 되었으며, 사헌부 감찰을 거쳐 노모를 봉양하고자 외직을 구하여 상주판관에 부임하였다. 그 후 의금부도사, 중추부도사, 영덕현령의 직을 역임했다. 관직을 물러난 뒤 향리인 소산으로 내려와 노모를 극진하게 봉양했다. 이 때 80이 넘은 노모를 위하여 마을 뒤에서 풍산들로 뻗은 동오봉(東吳峯) 자락에 삼구정(三龜亭)을 지었다. 삼구정은 마치 거북이 엎드린 모양의 바위가 세 개 있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5. 其他
가. 養素堂記
堂以養素名, 取質實純古之義也. 盖天下之患, 多在於文勝質, 質亡則樸散, 樸散則作僞, 作僞則無實, 而俗態自嫺, 古意全喪, 所謂古者, 何也. 卽大鴻之氣, 而純尨之色也. 誠而無僞, 渟而無澆, 眞而無妄, 蒼然古色, 從醇從朴, 其視末世淆薄浮詐之習, 不啻先天光景矣. 吾夫子, 亦取其先進之野人曰:“如用之, 吾從先進.” 彼哉, 後進之君子. 只是文過其質, 而俗下史底人也. 抑將焉攸用哉. 雖其童習而族好者, 不出乎禮云樂云, 而其志, 則欺世而己;其學, 則爲人而己, 無他, 文勝之弊也. 然則, 居今之世, 有意反古之俗者, 捨是素, 何以哉. 凡人之情, 莫不樂縱恣而惡拘撿, 崇華侈而薄淸素. 夫以同然之人心, 苟無素養之可言, 則服食居處, 其有不悉耳目者乎;聲色貨利, 其有不窮心志者乎. 然則, 是素也, 卽醫奢矯侈之一樂石, 而養之欲其有素也. 噫, 開闢之初, 是謂太素, 則浩爾太素, 曷渝色兮. 苟得其養, 無物不長, 則養素之道, 又孰大於寡欲乎. 寡欲而全眞, 全眞而反朴, 以至風醇氣厚, 機巧不萌. 以之意誠心公, 百體從令, 湛然虛明氣像, 自可見焉, 則彼明命赫然之天, 亦豊無虛室生白之理乎. 大抵素者, 物之質也. 實占夫不侈不華之目, 克儉克約之位, 而受采爲絢, 莫不於此爲本. 彼以其夸, 我以吾簡, 彼以其巧, 我以吾拙, 則倘所謂養素安冲漠者, 果非此堂之好題目乎. 况我從前世德, 率以素字爲符, ‘吾家無寶物, 寶物惟淸白.’ 寶白堂旁祖訓也. ‘帶礪還餘事, 淸白八百年.’ 淸陰先生詩也. 六世祖督郵公, 嘗堂揭素隱, 曾王父護軍公, 軒號素履, 旁親上舍公, 又自號望素, 則惟此素之一字, 便作吾傳家舊物也. 居在素之里, 而不失淸素之世業, 以至素富貴, 素貧賤, 素患難, 將無入而不自得焉, 由養之有素也. 彼養之以怙侈, 養之以驕泰, 而未幾失其養者, 又相距何如也. 寧牝無牡, 寧冷無熱, 寧沉無浮, 吾將以 ‘素行素安, 素爲絢, 白賁吉’之義, 更詔我世世子姓, 使之勿失其所養云. (東埜集 卷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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