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의 제사
◦陶山書院


1. 所在地:安東市 陶山面 土溪里 680番地
2. 祭日
제일(祭日)은 2월과 8월의 중정(中丁)이다. 다만 제일이 국기일(國忌日)과 겹치거나 유고(有故)가 있을 경우에는 중월(仲月)인 2월과 8월 하정(下丁)일로 물려 지낸다. 그러나 때에 따라 하정일이 없는 경우에는 해일(亥日) 또는 병일(丙日)로 옮겨서 올린다. 1995년(乙亥年) 춘향(春享)의 경우에는 세종(世宗)의 기일(忌日)과 겹쳐 하정(下丁)으로 물려 지냈다.

3. 沿 革
도산서원은 조선 중기 성리학의 대학자인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 선생이 돌아가신 4년 후인 1574년 사림에서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생전에 후학을 교육하던 도산서당(陶山書堂) 뒤에 사당을 지어 선생의 위패(位牌)를 봉안하고 강당인 전교당과 동재•서재 등의 부속건물들을 지어 우리 나라 사학의 원천으로 태동하였다.
도산서원의 전신은 도산서당과 계상서당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선생은 49세 말엽에 풍기군수를 사임하고 지금의 도산서원에서 3km 정도 떨어진 종가 건너편에 달팽이집 같이 작은 계상서당(溪上書堂)을 지어 학문강론을 시작하였는데, 선생의 학문이 거울을 보듯 깨끗해 많은 제자들이 입문하다 보니 장소가 협소하여 좀더 넓은 장소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이에 새로운 강학 장소로는 선생이 평소에 즐겨 찾던 청량산을 염두에 두었으나 산세가 험난하여 병약한 몸으로 오르내리기에 적당하지 않다는 판단으로 현재의 위치에 자리잡았다. 이 곳은 예전에 옹기 굽는 가마가 있었다하여 “질그릇 도(陶), 뫼 산(山)” 자를 써서 도산(陶山)이라 불렀으며, 주위는 영지산과 청량산 줄기가 병풍처럼 감싸고 있어 심신을 수련하고 학문을 닦기에 더없이 좋은 곳으로 판단하고 선생께서 이 곳으로 서당을 옮기고자 찾아왔더니 마침 적당한 넓이의 농지에 부부가 농사를 짓고 있어 얼마간의 돈을 주고 땅을 매입하여 서당을 지었다고 도산서당기에 기록하고 있다.
선생은 1557년부터 4년 만인 1561년(명종16)까지 도산서당(陶山書堂)과 농운정사(隴雲精舍)를 지어 이 곳에서 인격을 수양하고 학문을 연구하며 많은 제자를 교육하였다. 선생이 돌아가신 4년 후에 유림과 제자들에 의해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도산서당(陶山書堂) 뒤에 사당을 지어 위패(位牌)를 봉안하고 서원을 설립하였다. 이듬해인 1575년(선조8)에 사액(賜額) 되어 석봉(石峯) 한호(韓濩)가 쓴 도산서원(陶山書院)의 편액을 하사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그 후 1615년(광해군7)에 이르러 사림에서 월천(月川) 조목(趙穆) 선생을 종향(從享)하여 매년 춘•추로 향사하고 있다.
도산서원은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는 동시에 영남 유림의 정신적 중추구실을 하였으며, 대원군의 서원철폐 당시에 훼철되지 않고 존속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경내의 건물은 상덕사(尙德寺), 전교당(典敎堂), 전사청(典祀廳), 고직사(庫直舍),동재(東齋), 서재(西齋), 광명실(光明室), 장판각(藏板閣), 도산서당(陶山書堂), 역락서재(亦樂書齋), 농운정사(隴雲精舍), 진도문(進道門)과 유물전시관인 옥진각(玉振閣)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퇴계(退溪) 선생은 1557년(명종12)에 이 곳에 도산서당(陶山書堂)과 농운정사(隴雲精舍)를 승(僧) 법련(法蓮)을 시켜 짓기 시작하여 1561년(명종16)에 승(僧) 정일(淨一)이 완공하였다. 이 때 지은 서당은 3칸 크기로 가운데 방은 완락재(玩樂齋)라 명하고 마루는 암서헌(巖栖軒)이라 이름지어 이 곳에 거처하시면서 많은 제자를 가르쳐 수많은 인재를 길러낸 곳이다. 완락재(玩樂齋)라는 이름은 주자(朱子)의 명당실기(明堂室記)에 나오는 ‘도(道)와 이(理)를 즐기고 완상하며 죽을 때까지 싫어하지 않는다.’에서 따왔다(退溪集 卷3). 제자를 가르치며 휴식하던 공간인 마루를 암서헌(巖栖軒)이라 지은 것은 주자의 운곡시(雲谷詩)에서 따 온 것으로 ‘학문에 대한 자신을 오래도록 가지지 못하여 바위에 기대어 작은 효험이라도 바란다’는 겸손의 뜻을 지니고 있다. 암서헌에 잇대어 있는 살평상은 선생의 제자인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이 마루가 너무 좁아 여러 명이 앉을 수 없음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지은 것이다.
도산서원 경내에서 도산서당과 함께 선생이 살아 계실 때에 지은 집인 농운정사는 공자형(工字形)의 평면을 갖춘 팔간방(八間房)으로 문도(門徒)들이 거처하며 공부하던 강실(講室)로 사용한 곳이다. 건물의 평면을 공자(工字)로 정한 것은 심체공부(心體工夫)에 전념하기를 바라던 선생의 정신을 반영한 것이다. 이 건물은 여느 건물과 달리 창문이 많이 달려 있는데 이는 공부하는데 밝게 하기 위함과 문 틈 사이로 맑은 공기가 들어와 정신을 맑게 하기 위함에서이다. 건물의 오른쪽에 있는 마루를 ‘시습재(時習齋)’라 하였는데, 논어(論語) 학이(學而) 편에 나오는 “學而時習之 不亦說乎”에서 따온 것으로 유생들이 학문 닦기에 소홀하지 말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서편에 있는 마루를 관란헌(觀瀾軒)이라 하였는데, 제자들이 쉬는 곳으로 흐르는 낙동강의 푸른 물을 바라보며 흐르는 물의 순리를 터득하게 하였다.
보물 제211호로 지정되어 있는 상덕사(尙德祠)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와가로서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건물 전면에는 반 칸 후퇴하여 평주 4개를 설치하였다. 평면 구성은 매우 단순하여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마루방을 꾸미고 신위(神位)를 모셨다. 건물 내부에는 우물마루를 시설하였고 마루 위에는 여러 겹의 왕골자리를 깔아 신성한 장소로서의 의미를 부여하였다. 퇴계(退溪) 선생의 위패는 주벽에 모시고 월천(月川) 조목(趙穆) 선생의 위패는 동벽에 모셨다.
전교당(典敎堂)은 유생(儒生)들이 강학(講學) 하던 곳으로 정면 4칸, 측면 2칸의 규모이며 보물 제210호로 지정된 건물이다. 건물의 정면에 선조 임금이 한석봉에 명하여 쓰게 하였다는 도산서원(陶山書院) 현판이 걸려 있다. 건물의 좌측면 2통간(通間)은 온돌방으로 한존재(閑存齋)라 이름 붙여 이 곳에 서원의 원장이 거처하며 원무를 보던 곳이다. 건물 우측면 6칸은 모두 우물마루를 깐 대청으로 구성하였다. 대청은 각종 행사시에 강당으로 사용되던 곳으로 원규(院規), 백록동규(白鹿洞規), 사물잠(四勿箴), 경재잠(敬齋箴), 국기안(國忌案), 정조임금의 사제문(賜祭文) 등의 현판이 게첨되어 있다.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는 원생(院生)들이 기숙(寄宿)하면서 강학(講學)하던 곳으로 전교당(典敎堂) 앞에 대향배치(對向配置) 되어 있으며 각각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맞배지붕 집이다. 동재를 박약재(博約齋)라 이름하였는데 ‘박문약예(博文約禮)’에서 취한 말로 ‘학문은 넓히고 예를 지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서재는 홍의재(弘毅齋)라 이름하였으니 ‘넓고 의연한 마음을 갖자’는 뜻을 지니고 있다.
동서광명실(東西光明室)은 책을 보관하는 서고이며 광명(光明)은 ‘만권서적 혜아광명(萬卷書籍 惠我光明)’에서 취한 말로서 ‘수많은 서책이 나에게 광명을 준다’라는 뜻이고, 현판은 퇴계 선생의 친필이다. 광명실(光明室)은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로 습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2층 누각(樓閣) 건물로 지었다. 동광명실은 1819년(순조19)에 세운 건물로 역대왕의 내사서적(內賜書籍)과 선생이 친히 보시던 수택본(手澤本)이 보관되어 있고, 서광명실은 1930년에 중건된 건물로 문도를 비롯한 국내 유학자들의 문집 등 근래에 발간된 각종 서책들이 보관되어 있다. 동•서광명실에는 1,217종에 4,917권의 서적이 보관되어 있다.
장판각(藏板閣)은 전교당의 동쪽에 위치한 서원의 출판소로서 퇴계 선생 문집, 유묵, 언행록, 도산 12곡, 선조어필 등의 목판각이 37종 2,790여장의 병서(屛書), 액자(額子), 책의 판각이 소장되어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맞배집이다. 이 건물은 목판을 보관하는 관계로 장대석기단 위에 방주(方柱)를 세우고 전 칸을 우물마루로 깔았다. 기단 위로는 자연석 주초를 놓고 20cm 정도 높게 마루를 깔고 마루 밑은 통풍이 잘 될 수 있도록 사방을 개방하였다. 판각의 내부는 목판을 보관하기 위해 선반을 설치하고 벽체는 판벽으로 마감하여 환기와 통풍이 원활하게 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창호(窓戶)의 구성은 양 협칸 전면에 쌍여닫이 판문을 달고 어칸에는 쌍여닫이 세살문을 달았다. 문틀상부에는 살창을 내어 내부의 더워진 공기와 습기가 밖으로 배출될 수 있도록 고려하였다.
전사청(典祀廳)은 향사를 지낼 때 제물을 마련하여 두는 곳으로 제수청(祭需廳)과 주고(酒庫)가 있다. 이 건물은 동서(東西)의 두 건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각 정면 2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이다.
이 서원의 주향(主享)으로 모셔진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 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본관은 진보(眞寶) 또는 진성(眞城)이며, 자(字)는 경호(景浩)이고, 호는 퇴계(退溪)•퇴도(退陶)•도옹(陶翁)•도수(陶叟)이다. 시호(諡號)는 문순공(文純公)이다.
선생은 연산군 7년(1501) 11월 25일 경상도 예안현(禮安縣) 온계리(溫溪里: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 노송정(老松亭) 종택에서 7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진사(進士) 이식(李埴)이고 어머니는 춘천박씨이다. 어머니 박씨 부인이 ‘공자가 대문 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선생을 낳았다’ 하여 대문을 성림문(聖臨門)이라 부른다. 또 안채의 돌출된 방에서 태어났는데 그 방을 태계태실이라 부른다. 선생은 생후 7개월에 부친상을 당하였으나, 자모(慈母)요 현부인이었던 생모 박씨의 훈도 밑에서 총명한 자질을 키워갔다. 12세에 작은아버지 송재공(松齋公) 우(堣)로부터 논어를 배웠고, 14세 경부터 혼자 독서하기를 좋아하여, 특히 도연명(陶淵明)의 시를 사랑하고 그 사람됨을 흠모하였다. 20세 경 침식을 잊고 주역 공부에 몰두한 탓에 건강을 해쳐서 그 뒤로부터 다병(多病)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한다. 27세(1527)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어머니의 소원에 따라 과거에 응시하기 위하여 성균관에 들어가 다음해 사마시에 급제하였다.
선생은 30세에 봉사(奉事) 권질(權礩)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32세에는 무과초시(文科初試)에 2등으로 합격하고, 33세에 재차 성균관에 들어가 김인후(金麟厚)와 교유하며 『심경부주(心經附註)』를 입수하여 크게 심취하였다. 이 해에 귀향 도중 김안국(金安國)을 만나 성인군자에 관한 견문을 넓혔다. 34세(1534)에 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가 되면서 관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어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 겸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 12월에 무공랑(務功郞)으로 박사(博士)에 올랐다. 37세가 되던 1537년 4월에 선교랑(宣敎郞), 5월에 승훈랑(承訓郞), 9월에 승의랑(承議郞)에 오르고 10월에는 모친 박씨의 상(喪)을 당하자 향리에서 3년간 복상하였다. 39세에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 지제교(知製敎) 겸 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이 되었다가 곧 사가독서(賜暇讀書)에 임명되었다. 중종 말년에 조정이 어지러워지매 먼저 낙향하는 친우 김인후를 한양에서 떠나보내고, 이 무렵부터 관계(官界)를 떠나 산림에 은거할 결의를 굳힌 듯, 43세이던 10월에 성균관사성으로 승진하자 성묘를 핑계삼아 사가를 청하여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을사사화 후 병약을 구실 삼아 모든 관직을 사퇴하고, 46세(1546)가 되던 해 낙동강상류 토계(兎溪)의 동암(東巖)에 양진암(養眞庵)을 얽어서 산운야학(山雲野鶴)을 벗삼아 독서에 전념하는 구도생활에 들어갔다. 이 때에 토계를 퇴계(退溪)라 개칭하고, 자신의 아호로 삼았다.
그 뒤에는 자주 임관의 명을 받아 영영 퇴거(退居)해버릴 형편이 아님을 알고 부패하고 문란된 중앙의 관계에서 떠나고 싶어서 외직을 지망, 48세에 충청도 단양군수가 되었으나, 곧 형이 충청감사가 되어 옴을 피하여 봉임 전에 청하여 경상도 풍기군수로 전임하였다. 풍기군수 재임중 주자가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부흥한 선례를 따라서, 고려 말기의 주자학의 선구자 안향(安珦)이 공부하던 땅에 전임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창설한 백운동서원에 편액(扁額)•서적(書籍)•학전(學田)을 하사할 것을 감사를 통하여 조정에 청원하여 실현을 보게 되었는데, 이것이 조선조 사액서원(賜額書院)의 시초가 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다. 1년 후 퇴관하고, 어지러운 정계를 피하여 계상(溪上)의 서쪽에 한서암(寒栖菴)과 광영당(光影塘)을 지어 다시금 구도생활에 침잠하다가 52세(1552)에 성균관대사성의 명을 받아 취임하였다. 56세에 홍문관부제학, 58세에 공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여러 차례 고사하였다. 43세 이후 이 때까지 관직을 사퇴하였거나 임관에 응하지 않은 일이 20여 회에 이르렀다. 60세(1560)에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아호를 ‘도옹(陶翁)’이라 정하고, 이로부터 7년간 서당에 기거하면서 독서•수양•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많은 제자들을 훈도하였다. 명종은 예(禮)를 두터이 하여 자주 그에게 출사(出仕)를 종용하였으나 듣지 않자, 근신들과 함께 ‘초현부지탄(招賢不至嘆)’이라는 제목으로 시를 짓고, 몰래 화공을 도산으로 보내어 그 풍경을 그리게 하여 그것에다 송인(宋寅)으로 하여금 도산기(陶山記) 및 도산잡영(陶山雜詠)을 써넣게 하여 병풍을 만들어서, 그것을 통하여 조석으로 이황을 흠모하였다 한다. 그 뒤 친정(親政)의 기회를 얻자, 이황을 자헌대부(資憲大夫)•공조판서•대제학이라는 현직(顯職)에 임명하여 자주 초빙하였으나, 그는 그 때마다 고사하고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67세 때 명나라 신제(新帝)의 사절이 오게 되매, 조정에서 이황의 내경(來京)을 간절히 바라 그도 어쩔 수 없이 한양으로 갔다. 명종이 돌연 죽고 선조가 즉위하여 그를 부왕의 행장수찬청당상경(行狀修撰廳堂上卿) 및 예조판서에 임명하였으나 신병 때문에 부득이 귀향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황의 성망(聲望)은 조야에 높아, 선조는 그를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우찬성에 임명하여 간절히 초빙하였고, 그는 사퇴하였지만 여러 차례의 돈독한 소명을 물리치기 어려워 마침내 68세의 노령에 대제학•지경연(知經筵)의 중임을 맡고, 선조에게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를 올렸다. 선조는 이 소를 천고의 격언, 당금의 급무로서 한 순간도 잊지 않을 것을 맹약하였다 한다. 그 뒤 이황은 선조에게 정자(程子)의 「사잠(四箴)」, 『논어집주』•『주역』, 장재(張載)의 「서명(西銘)」 등의 온오(蘊奧)를 진강하였다. 노환 때문에 여러 차례 사직을 청원하면서 왕에 대한 마지막 봉사로서 필생의 심혈을 기울여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저술, 어린 국왕 선조에게 바쳤다. 이듬해 69세에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번번이 환고향(還故鄕)을 간청하여 마침내 허락을 받았다. 환향 후 학구(學究)에 전심하였으나, 다음해 70세가 되던 11월 종가의 시제 때 무리를 해서인지 우환이 악화되었다. 그 달 8일 아침, 평소에 사랑하던 매화분에 물을 주게 하고, 침상을 정돈시키고, 일으켜 달라 하여 단정히 앉은 자세로 역책(易簀:학덕이 높은 사람의 죽음)하였다.
선조는 3일간 정사를 폐하여 애도하고,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 겸 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 영사를 추증하였고, 장사는 제일(祭日) 등 영의정의 예(禮)에 의하여 집행되었으나, 묘소에는 유계(遺誡)대로 작은 돌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 새긴 묘비가 세워졌을 뿐이었다. 죽은지 4년만에 고향 사람들이 도산서당 뒤에 서원을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 낙성, 도산서원의 사액을 받았다. 그 이듬해 2월에 위패를 모셨고, 11월에는 문순(文純)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610년 문묘(文廟)에 배향(配享) 되었다.
이황이 『주자대전』을 입수한 것은 중종 38년, 즉 그의 43세 때였고, 이 『주자대전』은 명나라 가정간본(嘉靖刊本)의 복각본(復刻本)이었으며, 가정간본의 대본(臺本)은 송나라 때 간행된 것을 명나라 때 복간한 성화간본(成化刊本)의 수보본(修補本)이었지만, 그가 『주자대전』을 미독(味讀)하기 시작한 것은 풍기군수를 사퇴한 49세 이후의 일이었다. 이황은 이에 앞서 이미 『심경부주』•『태극도설』•『주역』•『논어집주』 등의 공부에 의하여 주자학의 대강을 이해하고 있었으나, 『주자대전』을 완미(玩味)함으로써 그의 학문이 한결 심화되었고, 마침내 주자의 서한문의 초록과 주해에 힘을 기울였는데, 그의 학문이 원숙하기 시작한 것은 50세 이후부터였다고 생각된다. 50세 이후의 학구활동 가운데서 중요한 것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53세에 정지운의 「천명도설(天命圖說)」을 개정하고 후서(後敍)를 썼고, 또한 『연평답문(延平答問)』을 교정하고 후어(後語)를 지었다. 54세에 노수신(盧守愼)의 「숙흥야매잠주(夙興夜寐箴註)」에 관하여 논술하였다. 56세에 향약을 기초, 57세에 『역학계몽전의(易學啓蒙傳疑)』를 완성, 58세에 『주자서절요』 및 『자성록』을 거의 완결지어 그 서(序)를 썼다. 59세에 황중거(黃仲擧)에 답하여 『백록동규집해(白鹿洞規集解)』에 관하여 논의하였다. 또한 기대승(奇大升)과 더불어 사단칠정에 관한 질의 응답을 하였고, 61세에 이언적(李彦迪)의 『태극문변(太極問辨)』을 읽고 크게 감동하였다. 62세에 『전도수언(傳道粹言)』을 교정하고 발문을 썼으며, 63세에 『송원이학통록(宋元理學通錄)』의 초고를 탈고하여 그 서(序)를 썼다. 64세에 이연방(李蓮坊)의 『심무체용론(心無體用論)』을 논박하였고, 66세에 이언적의 유고를 정리하여 행장을 썼고 『심경후론(心經後論)』을 지었다. 68세에 선조에게 「무진육조소」를 상서하였으며, 「사잠」•『논어집주』•『주역』•「서명」등을 강의하였다. 또한 그간 학구의 결정체인 『성학십도』를 저작하여 왕에게 헌상하였다. 「무진육조소」의 내용은, 제1조 계통을 중히 여겨 백부인 선제(先帝) 명종에게 인효(仁孝)를 온전히 할 것, 제2조 시신(侍臣)•궁인 참언(讖言)•간언(間言)을 두절하게 하여 명종궁(明宗宮)과 선조궁(宣祖宮) 사이에 친교가 이루어지게 할 것, 제3조 성학(聖學)을 돈독히 존숭하여 그것을 가지고 정치의 근본을 정립할 것, 제4조 인군(人君) 스스로가 모범적으로 도술(道術)을 밝힘으로써 인심을 광정(匡正)할 것, 제5조 군주가 대신에게 진심을 다하여 접하고 대간(臺諫)을 잘 채용하여 군주의 이목을 가리게 하지 않을 것, 제6조 인주(人主)는 자기의 과실을 반성하고 자기의 정치를 수정하여 하늘의 인애(仁愛)를 받을 것 등으로, 시무 6개조를 극명하게 상주한 풍격(風格) 높은 명문이다.
『성학십도』는 제1도 태극도(太極圖), 제2도 서명도(西銘圖), 제3도 소학도(小學圖), 제4도 대학도(大學圖), 제5도 백록동규도(白鹿洞規圖), 제6도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 제7도 인설도(仁說圖), 제8도 심학도(心學圖), 제9도 경재잠도(敬齋箴圖), 제10도 숙흥야매잠도(夙興夜寐箴圖)와 도설(圖說)•제사(題辭)•규약 등 부수문(附隨文)으로 되어 있다. 제1도는 도와 도설이 모두 주돈이(周敦頤)의 저작이며, 제2도에서 「서명」은 장재의 글이고, 도는 정임은(程林隱)의 작품이다. 제3도에서 제사는 주자의 말이고, 도는 『소학』의 목록에 의한 이황의 작품이다. 제4도에서 본문은 주자의 『대학경(大學經)』 일장(章)이고, 도는 권근(權近)의 작품이다. 제5도에서 규약은 주자의 글이고 도는 이황의 작품이며, 제6도에서 상도(上圖) 및 도설은 정임은의 저작이고 도는 이황의 작품이다. 제7도는 도 및 도설이 모두 주자의 저작이고, 제8도는 도 및 도설이 모두 정임은의 저작, 제9도에서 잠은 주자의 말이고 도는 왕노재(王魯齋)의 작품이며, 제10도에서 잠은 진남당(陳南塘)의 말이고 도는 이황의 작품이다. 그러므로 요컨대 제3•5•10도와 제6도의 중간 하도(下圖) 등 5개가 이황의 작품이고, 나머지 17개는 위에서 열거한 선현들의 저작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이들 유학사상의 정수들의 집약은 이황에 의하여 독창적으로 배치되어 서로 유기적으로 관련됨으로써 생명 있는 전체적 체계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이황의 학문은 일대를 풍미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역사를 통하여 영남을 배경으로 한 주리적(主理的)인 퇴계학파를 형성해 왔고, 토쿠가와(德川家康) 이래로 일본 유학의 기몬학파(崎門學派) 및 구마모토학파(態本學派)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쳐왔다. 또한, 개화기 중국의 정신적 지도자에게서도 크게 존숭을 받아, 한국뿐만 아니라 동양 3국에서 도의철학(道義哲學)의 건설자이며 실천자였다고 볼 수 있다. 『언행록』에 의하면, 조목(趙穆)이 이덕홍(李德弘)에게 “퇴계선생에게는 성현이라 할만 한 풍모가 있다.”고 하였을 때 덕홍은 “풍모만이 훌륭한 것이 아니다.”라고 답하였다 한다. 그리고 『언행통술(言行通術)』에서 정자중(鄭子中)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선생은 우리 나라에 성현의 도가 두절된 뒤에 탄생하여, 스승 없이 초연히 도학을 회득(會得)하였다. 그 순수한 자질, 정치(精緻)한 견해, 홍의(弘毅)한 마음, 고명한 학(學)은 성현의 도를 일신에 계승하였고, 그 언설(言說)은 백대(百代)의 후에까지 영향을 끼칠 것이다. 그 공적은 선성(先聖)에게 빛을 던져 선성의 학(學)을 후학의 사람들에게 베풀었다. 이러한 분은 우리 동방의 나라에서 오직 한 분뿐이다.” 위에서 밝힌 사실만 가지고도 우리는 그가 제자들에게서 성현의 예우를 받는 한국유림에서 찬연히 빛나는 제일인 자임을 엿볼 수 있게 된다.
이황의 학풍을 따른 자는 당대의 류성룡(柳成龍)•정구(鄭逑)•김성일(金誠一)•조목•이덕홍•기대승•김운월당(金雲月堂)•금응협(琴應夾)•이산해(李山海)•정탁(鄭琢)•정자중•구경서(具景瑞)•조호익(曺好益)•황준량(黃俊良)•이강이(李剛而) 등등을 위시한 260여인에 이르렀고, 나아가서 성혼(成渾)•정시한(丁時翰)•이현일(李玄逸)•이재(李栽)•이익(李瀷)•이상정(李象靖)•류치명 (柳致明)•이진상(李震相)•곽종석(郭鍾錫)•이항로(李恒老)•류중교(柳重敎)•기정진(奇正鎭) 등등을 잇는 영남학파 및 친영남학파를 포괄한 주리파 철학을 형성하게 하였으니, 이는 실로 한국유학사상의 일대 장관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특히 이익은 『이자수어(李子粹語)』를 찬술하여 그에게 성인(聖人)의 칭호를 붙였고, 정약용(丁若鏞)은 「도산사숙록(陶山私淑錄)」을 써서 그에 대한 흠모의 정을 술회하였다. 임진왜란 후 이황의 문집은 일본으로 반출되어 도쿠가와가 집정(執政)한 에도(江戶)시대에 그의 저술 11종 46권 45책이 일본각판으로 복간되어 일본 근세 유학의 개조(開祖) 후지와라(藤原惺窩) 이래로 이 나라 유학사상의 주류인 기몬학파 및 구마모토학파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고, 이황은 이 두 학파로부터 대대세세(代代世世)로 신명(神明)처럼 존숭을 받아왔다.
기몬학파의 창시자 야마사키(山崎暗齋)는 그를 “주자의 직제자(直弟子)와 다름 없다.”하고 ‘조선의 일인(一人)’이라 평가하였고, 그의 고제(高弟) 사토(佐藤直方)는 “그의 학식이 이룬 바는 크게 월등하여 원명제유(元明諸儒)의 유(類)가 아니다.”라고 찬양하였다. 이나바(稻葉黙齋)는 ‘주자의 도통(道統)’•‘주자 이래의 일인(一人)’이라 하여 존신(尊信)하였으며, 구마모토 학파의 시조 아쓰카(大塚退野)는 “만약에 이 사람이 없었다면 주자의 미의(微意)는 불명하여 속학(俗學)이 되어버렸을 것이라 생각된다”고 하였고, 도쿠가와 말기의 요코이(橫井小楠)는 그를 원•명 시대를 통하여 ‘고금절무(古今絶無)의 진유(眞儒)’라 절찬하였고, 역시 이 계통에 속하는 막부(幕府)말 메이지(明治) 시대의 구스모토(楠本碩水)는 “명대의 대유(大儒) 설경헌(薛敬軒)•호경재(胡敬齋)와 명말 청초의 육가서(陸稼書)•장양원(張楊園)과 비교하면 훨씬 탁월하다.”라고 단언하였다. 마쓰다(松田甲)의 『일선사화(日鮮史話)』에 의하면, 여코이의 친구이자 제자였던 메이지 제일의 공신이며 교육칙어(敎育勅語)의 기초자인 모토다(元前東野)는 “정주(程朱)의 학은 조선의 이퇴계(李退溪)에게 전하여졌고, 타이야(退野) 선생이 그 소찬(所撰)의 『주자서절요』를 읽고 초연히 얻은 바 있었으니, 내 지금 타이야의 학을 전하여 이것을 금상황제(今上皇帝)에게 봉헌하였다.”라고 술회하였다 한다. 뿐만 아니라 1926년 중국의 북경(北京) 상덕여자대학(尙德女子大學)에서 대학의 증축•확장기금에 충당하기 위하여 『성학십도』를 목판으로 복각(復刻)하여 병풍을 만들어서 널리 반포(頒布)하였을 때, 중국 개화기의 대표자인 사상가 량치차오(梁啓超)는 찬시(讚詩)를 써 그 제1연에서 “아득하셔라 이부자(李夫子)님이시여”라고 그를 거리낌없이 성인이라 호칭하였다. 일본 유학에의 영향을 제외하면 다음과 같은 조호익의 말은 이황의 학적 지위를 간결히 표현한 매우 적절한 평가라 볼 수 있다. 즉, “주자가 작고한 뒤…… 도(道)의 정맥은 이미 중국에서 두절되어버렸다. 퇴계는 ……한결같이 성인의 학으로 나아가 순수하고 올바르게 주자의 도를 전하였다. 우리 나라에서 비교할만한 사람이 없을 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이만한 인물을 볼 수 없다. 실로 주자 이후의 제일인자이다.”
1610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었고, 그 뒤 그를 주사(主祀)하거나 종사하는 서원은 전국 40여 개에 이르렀으며, 그의 위패가 있는 도산서원은 8•15광복 후 국비보조로 크게 보수, 증축되어 우리 나라 유림의 정신적 고향으로서 성역화 되었다. 이황의 학덕은 그의 생시(生時) 및 한일 양국의 역사에서 크게 선양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 있어서도 국제적 규모로 널리 부흥. 재검토되고 있다. 1970년 서울에 퇴계학연구원이 창립되었고, 1972년 퇴계 400주기기념논문집 『퇴계학연구』가 간행되기 이전부터 발행된 계간학술지 『퇴계학보』는 1990년 3월 현재로 54집에 이르렀다. 경북대학교에 퇴계연구소가 부설되었는가 하면, 서울과 거의 같은 시기에 일본 동경에 이퇴계연구회가 설립되었다. 대만에도 국립사범대학 안에 퇴계학연구회가 부설되었고, 근래에는 미국의 워싱톤•뉴욕•하와이에 이퇴계연구회가 조직되었으며, 독일 함부르크 및 본에 퇴계학연구회가 생겼다. 1986년에는 단국대학교에서 퇴계기념 중앙도서관이 낙성되어 그 안에 퇴계학연구소를 부설하였다. 또한, 국제퇴계학회가 창설되어 1976년 이래로 거의 해마다 한국•일본•대만•미국•독일•홍콩 등지에서 국제학술회를 개최하여 세계 각국의 이 방면의 석학들이 회동하여서 주제논문을 발표하며 진지한 토론을 거듭해왔다. 특히, 1989년 10월 국제퇴계학회와 중국인민대학이 공동주최한 제11차 국제학술대회가 북경에서, 그리고 1990년 8월 제12차 국제학술대회가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바 있다.
퇴계선생 탄신 500주년이 되는 2001년은 선생의 사상과 학문을 기리는 다양한 행사가 준비중이다.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위치한 퇴계종택 주위에 퇴계공원 조성을 비롯하여 국제학술회의 개최, 안동국제유교문화제 개최 등 다채로운 행사가 준비중에 있으며, KBS방송국에서는 퇴계의 학문을 쉽게 접근하고 어렵게만 느껴지는 퇴계의 사상을 재조명하고 일반인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기 위하여 굿모닝 미스터 퇴계라는 파격적인 제목의 기획 프로를 21세기를 여는 2001년 1월 1일 방송하였다.
도산서원에 배향된 월천(月川) 조목(趙穆. 1524~1606) 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본관은 횡성(橫城)이고 자는 사경(士敬)이며 호는 월천(月川)이다. 아버지는 참판 대춘(大椿)이며,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로 수익(受益)의 딸이다. 3세에 글을 읽기 시작하였으며, 12세에 사서삼경을 다 읽었다. 15세 때에 이황(李滉)의 문하생으로 들어가서 학업에 더욱 정진하였다. 23세에 어머니 상을 당하였는데, 효심이 지극하여 이황은 대성할 그릇이 약관 나이로 몸을 상하지 않을까 염려할 정도였다. 1552년(명종 7)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대과(大科)는 포기하고 독선일신(獨善一身)에만 매진하였다. 1566년 공릉참봉에 증직되었으나 학덕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이황을 가까이 모시면서 경전연구에 주력하였다. 그 뒤 성균관수천(成均館首薦)에 피선되고, 집경전참봉(集慶殿參奉)에 제수되었으며, 1572년(선조 5) 이후 동몽교관•종부시주부•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공조좌랑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576년 봉화현감에 제수되자 사직소를 올렸으나 허락되지 않아 봉직하면서 향교를 중수하였다. 1580년 이후 전라도도사•경상도도사•충청도도사•형조좌랑•신령현감•영덕현령•전생서주부•공조정랑•상서원판관 및 금산•단양•합천 등의 군수, 장원서장원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594년 군자감주부로 잠시 있었으며 일본과의 강화를 극력 반대하였다. 그 뒤 장악원정•사재감정•예빈시정•공조참의•공조참판 등을 제수받았으나 모두 재덕과 노병을 이유로 사직소를 올려 사퇴하였다. 그는 이황과 동향인 예안에서 생장하여 일찍 이황의 문하생이 된 이후로 일생 동안 가장 가까이 스승을 모신 팔고제(八高弟)의 한 사람이다. 이황이 죽은 뒤 문집 편간, 사원(祠院)의 건립 및 봉안 등에 있어서 항상 성의를 다하였고, 마침내 도산서원 상덕사(尙德祠)에 유일한 배향자가 되었다.
그는 신민(新民)보다 명덕(明德)을 중시하여 벼슬은 사양하고 현사사(玄沙寺)•광흥사(廣興寺)에 들어가 독서를 즐겼으며, 이황을 수행하며 명산대천을 주유하면서 심신을 수양하였고, 경학을 연찬하되 이기설보다는 훈고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심학(審學)에 심취하여 『심경(心經)』에 관한 논설이 많다. 또, 외직에 부임하면 향교를 중수하고 서당을 신설하는 등 고을의 교육진흥에 이바지하였으며, 귀향하여서는 매년 역동서원(易東書院)•도산서원을 참배하여 현인의 넋을 기리고 자신의 몸가짐을 더욱 돈독히 닦아나갔다. 그의 일생을 통하여 주된 업적은 이황에 대한 소술(紹述)과 존봉(尊奉)에 있다 하겠다. 문집에는 이황에 관계된 글이 주를 이루고 있음을 볼 때 이를 잘 증명한다. 평생을 청빈하게 지내면서 온후, 겸양, 독실한 실천을 지향하였다. 제자로는 김중청(金中淸)•이광윤(梨光胤) 등이 있고, 저서는 『월천집』과 『곤지잡록(困知雜錄)』이 있다.

4. 享祀儀禮
1) 謁廟禮


향사(享祀)의 준비는 향사가 드는 달 삭일(朔日)에 공사원(公事員)이 전교당(典敎堂)에 개좌(開座)하여 헌관 4명(初•亞•終•分獻官)과 축관(祝官) 1명에게 망기(望記)를 하고 제유(諸儒)에게는 출문(出門)하여 알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망기를 받은 분이 집안에 유고(有故)가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입재(入齋)날 이전까지는 단자(單子)를 내어 행공(行公)을 할 수 없음을 밝혀야 한다. 이 경우 전임록(前任錄)에는 미행공(未行公)으로 표시하여 기재한다. 유고가 없어 향사에 참여할 수 있는 헌관과 축관 및 제유생들은 향사 사흘 전에 입재(入齋)하여야 하며, 향사가 끝날 때까지 서원 밖에 다시 나가지 않으며 경내에 머물면서 경건한 마음으로 정신을 가다듬는다. 입재(入齋)를 한 헌관 이하 집사들은 먼저 의관을 정제한 후 사당으로 나아가 알묘례(謁廟禮)를 올린다. 알묘례는 향사 전날 아침에 올리는 것으로써 입재(入齋)를 고하며 향사 올리러왔음을 알리는 의식이다. 알묘례를 행하기 전 모든 유생(儒生)이 전교당(典敎堂) 뜰에 줄지어 서서 집사를 선출하는데 향례정재일알묘례예절목(享禮整齋日謁廟例禮節目)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祝及諸生○東西 序立於庭○齋有司 或年高者 薦出曹司○祝薦出執禮○曹司 進執禮前 相揖○執禮 差出 謁者○曹司 進謁者前 相揖○差出奉香奉爐○祝及執禮 東西 相向立○諸生 次次 序立○上揖○因行 謁廟禮○執禮 執笏 先入 廟庭○唱笏○禮畢後 行堂揖禮○獻官 以下 以次出

축관과 여러 유생이 동•서로 나누어 전교당 뜰에 줄지어 서면 재유사 또는 나이가 많은 분이 먼저 조사를 추천한다. 축관이 집례를 추천하면 조사가 집례의 앞으로 나아가 서로 읍을 한다. 집례가 알자를 천거하면 조사가 알자의 앞으로 나아가 서로 읍을 한다. 이어 집례가 봉향과 봉로를 추천한다. 축관과 집례가 동•서로 서고, 여러 유생이 차례차례 줄지어 서서 마주보고 서로 읍을 한다. 이어서 알묘례의 예를 행한다. 먼저 집례가 홀기를 들고 묘정으로 들어가 홀기를 읽는다. 이어 당읍의 예를 행한 후 헌관 이하 차례로 나간다.

알묘례(謁廟禮)는 홀기(笏記)에 의하여 새벽 6시경에 진행되는데 향례정재일알묘홀기(享禮整齋日謁廟笏記)는 다음과 같다.

謁者 引獻官 就門外位 引入廟庭 諸執事 各就位 謁者 引獻官 詣盥洗位 盥洗 引詣神位 前 跪 三上香 俯 伏 興 引降復位 獻官 以下 皆再拜 鞠躬 拜 興 平身 禮畢 出

알자가 헌관을 인도하여 사당문 밖 자리로 나아간 후 다시 인도하여 사당 뜰 안으로 나아간다. 이어서 모든 집사가 각자 자기의 자리로 나아가면 알자는 헌관을 인도하여 손씻는 자리로 나아간다. 헌관은 손을 씻고 수건에 닦은 다음 신위 앞으로 나아간다. 퇴계 선생 신위 앞으로 나아간 헌관이 꿇어앉아서 향을 세 번 올리고 몸을 굽혀 엎드렸다 일어난다. 알자는 헌관을 인도하여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면 헌관 이하 모든 유생들이 재배한다. 이로서 모든 예를 끝내고 사당 밖으로 나온다.


알묘례(謁廟禮)가 끝난 후 유사(有司)들이 전사청으로 나아가 제기(祭器)의 숫자를 맞추어보고 척기(滌器)가 되었는가 살피는 척기의식(滌器儀式)을 행한다. 제기는 보(簠)•궤(簋)•사변(四籩)•사두(四豆)로 이루어져 있다. 보(簠)와 궤(簋)는 제향(祭享) 때에 도량(稻梁)과 서직(黍稷)을 담는 그릇이며, 사변(四邊)은 대나무로 만든 굽이 있는 네 가지 제기로써 과실이나 포를 담고, 사두(四豆)는 굽이 있는 목기(木器)로써 김치 또는 식해 등을 담을 때 사용한다. 그 외에 소 모양의 주전자와 촛대, 술잔 등이 사용된다.

2) 分定禮
향사(享祀) 전날 오시(午時)에 열리는 집사분정은 전교당에 모여 이미 천거된 4명의 헌관과 축관 이외에 제사 진행시 부문별로 임무를 맡을 사람을 뽑아 할 일을 맡기는 의식이다. 분정(分定)은 헌관 이하 집사들이 전교당에 개좌하여 서로 상읍례(相揖禮)를 한 뒤 도사령(都司令)이 ‘개좌(開座) 아뢰오’를 세 번 외치는 것으로 시작된다. 도사령(都司令)은 하인(下人)이나 노비(奴婢)이지만 그의 개좌구령(開座口令)은 모든 유생들에게 권위가 있다고 한다. 개좌(開座)의 순서는 나이순으로 앉지 않고 치서(齒序)에 의하여 엄격히 규제된다. 전교당 벽에 걸려 있는 분정판을 내려 미리 준비된 한지를 붙이고 시도기(時到記)에 기록된 유생(儒生)들의 명단을 보면서 각 위치에 알맞은 유생을 천거하여 분정판을 기록한 다음 모든 유생(儒生)들이 볼 수 있도록 걸어둔다. 2000년(庚辰) 춘(春)•추(秋) 향사시 분정은 다음 표와 같다.


분정(分定)이 끝나면 축관(祝官)이 사당에 들어가서 축판(祝板)을 가지고 나온다. 축문(祝文)은 주향(主享)과 종향(從享) 두 위(位)를 합쳐 하나만 쓰는데 을해년 축문은 다음과 같다.

維歲次乙亥二月辛卯朔二十七日丁巳後學義城金時寅敢昭告于

先師退陶李先生伏以心傳孔孟道紹閩洛集成大東斯文準極謹以豕牲粱盛淸酌庶品式陳明薦以月川趙公從享 尙

饗



이 축문은 월천(月川) 조목(趙穆) 선생이 지었다. 다만 ‘월천(月川) 조공(趙公) 종향(從享)’의 여섯 자는 월천(月川) 선생을 종향한 이후에 추가한 것이다.
축문(祝文) 작성이 끝나면 집사들은 상읍례(相揖禮)를 한 후 파좌(罷座)한 뒤 일어난 후 다시 앉으면 당중(堂中) 유사(有司)가 나와서 큰 목소리로 백록동규(白鹿洞規)와 예안향약(禮安鄕約)을 읽고 축관은 축문(祝文)을 사당으로 가져간다. 이어서 헌관 및 집사들은 각 처소에서 식사를 한다. 점심식사를 한 후 오후에는 제사에 쓸 쌀, 기장, 돼지 등의 제물을 검사하는 제물(祭物) 생간의식(牲看義式)을 한다. 이 때에는 헌관 이하 모든 집사들은 전교당(典敎堂) 계단 아래에 남향(南向)하여 동서로 서립(序立)하면 준비된 제물을 서원의 정문인 진도문으로 운반하여 온다. 제물 중 돼지는 뜰 가운데 안치하여 검사를 받고, 쌀과 기장은 전사청에 있는 상위에 올려놓고 다시 뜰로 나온다. 이 때에 헌관 이하 각 유사들이 북향(北向)하여 서립(序立)한다. 이렇게 하여 제물생간이 끝나면 각자 처소로 돌아가 휴식을 취한다. 돼지는 고직사 옆에서 잡아 제수로 장만하는데 예전에는 양고기를 썼다. 유사(有司)는 다시 전사청으로 가서 제주(祭酒)의 두량(斗量)을 검사하고 항아리에 담아서 봉한다. 제주(祭酒)는 원위(元位)가 5두이고 종향위(從享位)가 3두이다. 이렇게 하여 모든 준비가 완료되면 저녁식사를 마칠 때까지 각자 처소에서 휴식한다.


저녁 식사를 한 후 헌관 이하 모든 집사들을 의관을 정제하고 다시 전사청의 뜰에 동서로 서립(序立)하고 석미(淅米)와 습례(習禮)를 행한다. 석미(淅米)란 제사에 사용할 쌀과 기장을 씻는 의식이며, 습례(習禮)란 분정(分定)에 의하여 선정된 각 집사들의 임무와 역할에 대하여 연습을 함으로써 실수 없이 향사를 치르기 위하여 연습하는 것을 말한다.
습례는 구관유사가 찬자의 홀기에 따라서 집사들의 위치선정, 임무 등을 지도한다. 습례 준비가 되면 도사령(都司令)이 “개좌(開座) 아뢰오”를 세 번 외친다. 전교당 뜰에 서립(序立)한 전 참가자들은 선 상태에서 읍(揖)을 한다. 그 다음 제관들이 뜰을 한 바퀴 돌아서 전사청을 경유하여 사당으로 들어가 습례를 고하고 밖으로 나오면 전사청에서 기다리고 있던 시사가 쌀과 기장이 담긴 물동이 두 개를 들고 나오면 그 뒤를 제관들이 따른다. 시사(時使)가 물동이를 들고 뜰의 중앙 통로를 지나면 나머지 참가자들이 동서로 서립(序立)하여 읍(揖)을 한다. 진도문 밖을 나온 쌀과 기장은 우물에 가서 물을 아홉 번 떠서 손을 넣지 않고 아홉 번을 일어 씻는다. 이 때 쌀 씻는 횟수를 집사가 선창하는 것은 제관들이 그 소리를 듣고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 의식을 석미(淅米)라 한다. 쌀 씻기가 끝나면 전교당을 한 바퀴 돌고(이 때 참가자들은 읍을 한다) 전사청으로 보낸다. 이 때 구관유사가 선두에 서고 다음에 석미를 든 제관이 서며 그 뒤에 5명의 제관이 뒤따른다. 그리고 제관들이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면 도사령(都司令)이 “파좌(罷座) 아뢰오”를 세 번 외친다. 석미(淅米)가 끝나면 헌관과 축관은 전사청에 딸려 있는 방으로 올라가 휴식하고 나머지 집사들은 구관유사의 지도 아래 습례를 행한다.
습례는 약 1시간 정도 진행되는데 찬자의 홀기에 따라 향사시에 실수가 없도록 하기 위하여 연습하는 것을 말한다.


3) 陳設
제물의 장만과 진설은 홀기에 적혀 있는 물목대로 깨끗이 준비하고 진설도에 따라 진설을 한다. 잣은 껍질을 벗기지 않은 상태로 깨끗이 씻어서 쓰고, 무는 껍질을 벗겨 작게 토막을 잘라서 쓰며, 미나리, 쇠고기 꼬치, 돼지고기 등의 제물을 정성껏 장만하여 진설한다.
제물 진설이 끝나면 구관유사는 축시 전(丑時前)에 진설도(陳設圖)를 가지고 입묘(入廟)하여 제물이 바로 진설 되었는가를 확인한다.

4) 享祀禮
향사례는 축시(丑時)가 되면 올린다. 자정이 조금 지나자 모두 세수를 하고 의관(衣冠)을 갖춘다. 헌관들은 전교당 대청에서 집사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관복을 입고 사모를 쓰며 목화를 신고 손에 홀을 든다. 나머지 집사들은 각 처소에서 도포에 유건을 쓴다. 이렇게 의관이 갖추어지면 헌관은 전교당 대청에 꿇어앉고, 집사들은 전교당 뜰로 나와 북쪽을 향하여 서립(序立)한다. 축시(丑時)가 되자 도사령(都司令)이 “개좌 아뢰오”라고 3번 외치면 모든 집사들이 동서로 나누어 서고 상읍례(相揖禮)를 한다. 그러면 찬자(贊者)가 앞으로 나와 읍을 하고 “개좌례요”를 삼창하고 난 후 홀기를 들고 사당으로 들어가 절을 한다. 절을 하고 난 후 사당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에 서서 창홀을 한다. 이 때부터 향사는 찬자의 창홀에 따라 진행된다. 홀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諸執事先詣外位○謁者引初獻官點視陳設○執事開櫝○開盖○謁者及贊引各引獻官就外位○贊引引祝及諸執事入就拜位○再拜○鞠躬拜○興○拜○興○平身○贊引引祝及諸執事詣盥洗位○盥洗○各就位○謁者及贊引各引獻官入就拜位○再拜○鞠躬拜○興○拜○興○平身○謁者引初獻官詣盥洗位○盥洗○引詣神位前○跪○三上香○俯伏興○引降復位

行初獻禮
謁者引初獻官詣尊所○引詣 神位前○跪○奠爵○俯伏興○少退跪○讀祝○俯伏興○引降復位

行亞獻禮
贊引引亞獻官詣盥洗位○盥洗○引詣尊所○引詣 神位前○跪○奠爵○俯伏興○引降復位

行終獻禮
贊引各引終獻官分獻官詣盥洗位○盥洗○各引詣尊所○各引詣 神位前○跪○奠爵○俯伏興○引降復位

飮福受胙
執事詣尊所○以爵酌福酒○執事進減 神位前胙肉○謁者引初獻官詣飮福位○北向跪○執事進獻官之左○以爵授獻官○獻官飮卒爵○執事受虛爵○執事北向以胙授獻官○獻官受胙○授執事○俯伏興○引降復位○再拜○獻官皆再拜○鞠躬拜○興○拜○興○平身

徹籩豆
祝入徹籩豆○在位者皆再拜○鞠躬拜○興○拜○興○平身

望瘞
謁者引初獻官詣望瘞位○北向立○祝取板降自西階○瘞坎○引降復位○謁者引初獻官贊引引獻官以次出○祝及諸執事皆復拜位○再拜○鞠躬拜○興○拜○興○平身○以次出

먼저 모든 집사는 사당문 밖 자리에 나아간다. 알자가 초헌관을 인도하여 진설을 점검한다. 진설 점검이 끝난 후 초헌관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면 집사가 주독을 열고 보와 궤의 뚜껑을 연다. 알자와 찬인은 각기 헌관을 인도하여 사당문밖 자리로 나아간다. 찬인이 축관과 모든 집사를 인도하여 사당 안 절하는 자리로 들어서서 재배를 한 후 몸을 굽혀 엎드렸다 일어난다.
그 후 찬인이 축관과 모든 집사를 인도하여 손씻는 자리에 나아가 읍(揖)을 하면 손을 씻고 동쪽 계단으로 올라가 분정(分定)에 의하여 정해진 자기의 자리로 나아간다. 헌관과 집사의 위치도는 다음과 같다.


제집사의 위치가 정해지면 알자와 찬인이 각기 헌관을 인도하여 절하는 자리에 들어선다. 헌관은 재배한 후 몸을 굽혀 엎드렸다 일어난다.
헌관 재배가 끝나면 알자가 초헌관을 인도하여 손 씻는 자리로 나아가 읍을 하면 초헌관은 손을 씻고 동쪽 계단을 올라서서 다시 알자와 서로 읍을 한 후 기둥을 지나 중문을 통하여 신위 앞으로 나아간다. 신위 앞에 이른 초헌관이 꿇어앉아서 향을 세 번 올리고 몸을 굽혀 엎드렸다 일어나 동문으로 나오면 알자가 초헌관을 맞이하여 서로 읍을 한 후 준소(尊所)를 지나 중문 앞을 돌아 나와 다시 동쪽 계단으로 내려와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다.


<初 獻 禮>
알자가 초헌관을 인도하여 제주항아리 앞으로 나아간 후 서로 읍을 하면 초헌관은 중문으로 들어가 신위 앞에 꿇어앉는다. 전작이 제상 위에 있는 술잔을 내려 봉작에게 주면 봉작은 이 술잔을 사준에게 준다. 사준은 술잔에 술을 채워서 봉작에게 주면 봉작은 전작에게 준다. 전작은 이 술잔을 초헌관에게 주면 초헌관은 술잔을 받아서 다시 전작에게 건네주고 전작이 술잔을 받아 제상 위에 올린다. 초헌관은 몸을 굽혀 엎드렸다 일어나 뒤로 약간 물러나 꿇어앉는다. 축관이 축판을 들고 축문을 낭독하면 초헌관은 다시 몸을 굽혀 엎드렸다 일어난 후 동문으로 나오면 알자가 초헌관을 맞이하여 상읍(相揖)을 한 후 기둥을 돌아서 동쪽 계단으로 내려와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면 초헌례가 끝이 난다.

<亞 獻 禮>
찬인이 아헌관을 인도하여 손씻는 자리에 나아가 상읍(相揖)을 하고 아헌관은 손을 씻고 찬인의 인도를 받으며 동쪽 계단으로 올라서서 제주항아리 앞으로 나아간 후 중문을 통해 사당 안으로 들어가 신위 앞에 꿇어앉는다. 전작이 술잔에 술을 따라서 아헌관에게 주면 아헌관이 받아서 잔을 올리고 전작이 다시 술잔을 받아 제상 위에 올린다. 잠시 후 아헌관은 몸을 굽혀 엎드렸다 일어나 동문으로 나오면 찬인이 맞이하여 상읍(相揖)하고 중문 앞 기둥을 돌아서 다시 동쪽 계단으로 내려와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면 아헌례가 끝난다.

<終 獻 禮>
찬인 2명이 종헌관과 분헌관을 인도하여 손씻는 자리로 나아가 상읍(相揖)을 한 후 종헌관과 분헌관은 손을 씻고 동쪽 계단으로 올라서서 제주항아리 앞으로 나아가 다시 상읍(相揖)을 한다.

종헌관이 먼저 중문으로 들어가 신위 앞에 꿇어 앉으면, 분헌관이 그 뒤를 이어 배향(配享)된 월천(月川) 선생 신위 앞으로 나아가 꿇어앉는다. 전작 2명이 제상 위에서 술잔을 내려 잔에 술을 따르고 종헌관과 분헌관에게 주면 각기 술잔을 받았다가 다시 전작에게 주고 전작이 술잔을 받아서 제상 위에 올린다. 이어서 각 헌관은 몸을 굽혀 엎드렸다 일어나 동문을 통하여 나오면 찬인 2명이 맞이하여 상읍(相揖)을 하고 중문 앞 기둥을 돌아서 동쪽 계단으로 내려와서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면 종헌례가 끝난다.

<飮福受胙>
집사가 먼저 제주항아리 앞에 나아가 술잔으로 복주를 뜨고 신위 앞에 진설된 조육(胙肉)을 조금 덜어내어 음복(飮福) 준비를 한다. 준비가 되면 알자가 초헌관을 인도하여 음복 자리로 나아간다. 이 때에도 각 위치를 지날 때마다 상읍(相揖)을 한다. 음복 자리에 나온 초헌관은 북쪽을 향하여 꿇어앉는다. 그러면 집사가 초헌관의 왼쪽에 나아가 술잔을 초헌관에게 주면 제주잔을 받아 마시고 빈잔을 집사에게 다시 준다. 집사는 북쪽을 향하여 헌관에게 조육(胙肉)을 주면 헌관은 받았다가 다시 집사에게 준다. 음복이 끝나면 헌관은 몸을 굽혀 엎드렸다 일어난 후 알자의 인도로 다시 동쪽 계단으로 내려와서 원래의 자리로 돌아와 재배한다. 초헌관이 재배한 후 헌관 이하 모두가 함께 재배한다.

<徹籩豆>
철변두(徹籩豆)는 제기(祭器)로 사용한 변두(籩豆)를 철상하는 것을 말하는데 축관이 사당으로 들어가서 행한다. 철변두(徹籩豆)가 되면 자리에 있는 사람은 몸을 굽혀 재배한다.


<望瘞>
망예(望瘞)란 축문(祝文)을 땅에 묻는 의식을 말한다. 알자가 초헌관을 인도하여 망예의 자리로 나아가 북쪽을 향하여 서면 축관이 축문을 갖고 서쪽 계단으로 내려와 미리 준비된 망예 자리에 축문을 접어서 묻고 물을 조금 뿌린 후 기왓장으로 잘 덮는다. 망예가 끝나면 알자는 초헌관을 인도하여 원래의 위치로 돌아온다.
이러한 순서로 향사례가 끝이 나면 알자는 초헌관을 인도하고 찬인은 아헌, 종헌, 분헌관을 인도하여 차례로 사당 밖으로 나온다.


헌관이 모두 밖으로 나가면 축관과 모든 집사가 함께 절하는 자리로 나아가 재배하고 차례대로 사당 밖으로 나와서 전교당 대청으로 오른다. 전교당 대청에 모이면 헌관을 중심으로 하여 집사와 유생들이 둘러앉는다. 전작이 축관 앞에 읍을 하여 뵙고, 조사(曹司)는 집례(贊者)에게 향사시(享祀時) 실수나 예의에 벗어난 일이 없는지를 묻는다. 그러면 집례가 없었다고 하면 “파좌례(罷座禮)”를 고하고 각 처소로 돌아간다.


5) 飮福開座
파재일(罷齋日) 아침 일찍 일어난 헌관 및 집사들이 전교당(典敎堂) 대청에 앉아 개좌(開座)하고 음복상(飮福床)을 받는다. 이 때에도 모두 의관을 정제한다. 음복(飮福)은 초헌관부터 술을 따르고 집사들의 잔에도 술을 따른 다음 음복을 한다.
이렇게 음복을 할 때 술잔을 입에 대기 전 헌관 이하 집사는 서로 읍을 하고 나서 술잔을 든다. 초헌관 음복이 끝나면 아헌관, 종헌관의 순서로 음복을 하는데 그 절차는 초헌관 때와 같다. 음복이 끝나면 음복상에 나온 다른 제수는 싸 가지고 도포 속에 넣고 파좌례(罷座禮)를 한다. 이로써 3일간의 향사(享祀)는 모두 끝이 나고 모든 유생들은 상하유사(上下有司)에게 절하고 각자 귀가한다.

6) 書院의 出入과 升降
향사를 올릴 때 서원의 정문인 진도문(進道門)의 출입은 복인(服人)이나 예복(禮服)을 갖추지 않으면 출입이 엄격히 통제된다. 그러나 요즈음은 서원을 찾는 관람객이 많아 엄격한 통제가 어려워 향사에 참여하는 유생(儒生)들만 예복을 갖추고 출입을 한다. 만약 부득이 복인이 출입코자 할 때에는 서쪽 협문(夾門)을 통하여야 한다.


서원의 묘우(廟宇)인 상덕사(尙德祠)나 강당인 전교당(典敎堂)을 오르내리는데는 동서 양 계단 중 서쪽 계단을 오르내릴 수 있는 사람은 존빈(尊賓) 또는 지비자(至卑者)에 한하며 일반 유림은 동쪽 계단을 이용하여야 한다. 존빈(尊賓)은 나라에서 보내는 치제관(致祭官)이나 수령방백(守令方伯)이고, 지비자(至卑者)는 고직(庫直) 또는 원노(院奴)였으니 묘한 대조를 보이고 있다. 이것은 묘우(廟宇)인 상덕사(尙德祠)에서도 엄격히 적용되는데 이 곳에서는 초헌관과 축관이 축문을 땅에 묻기 위하여 내려올 때에만 서쪽 계단으로 내려온다.
묘(廟)의 출입은 아주 엄격하게 지켜진다. 헌관과 모든 집사들은 동쪽 계단으로 올라가서 중문으로 들어간 후 동문으로 나오고 다시 동쪽 계단으로 내려온다. 이 때 헌관과 집사는 반드시 기둥을 돌아 나와야 한다.

5. 薦望
서원에서 상하 유사(有司)를 선출하는 절차를 천망(薦望)이라고 부르고 천(薦)에 들어 그 후보가 되는 사람에게 보내는 사령장(辭令狀)을 망기(望記)라 한다. 대부분 서원에서는 향사(享祀)가 끝난 후 아침 일찍 음복개좌를 한 다음 천망(薦望)을 하는 것이 통례이다. 그러나 도산서원의 경우에는 향사(享祀)가 드는 달 삭일(朔日)에 공사원(公事員)이 전교당(典敎堂)에 개좌(開座)하여 헌관 4명과 축관 1명을 선출하여 망기(望記)를 올린다. 이와 같은 인선절차에 의하여 춘추 향사에 참례할 자격을 얻는다.
도산서원의 유사 임원 조직은 다음과 같다.
◦ 상유사(上有司:都有司):수임(首任) 또는 원장(院長) 등으로 불리는데 서원의 모든 일을 통괄하며, 임기는 일기(一期)이다. 일기는 정알•춘향•추향을 각각 일기라 하며 이를 합하여 삼기(三期)라 한다. 상유사는 1명 선출.
◦ 재유사(齋有司):서원에서 간사(幹事) 또는 서사(庶事)의 역활을 한다. 임기는 2년이며 2명을 선출.
◦ 구관유사(句管有司):구관도감(句管都監)이라고도 하며 원장의 명을 받아 서원의 재산을 총괄하며 실질적으로 서원 내의 모든 대소사를 맡아본다. 임기는 3년으로 재임될 수 있으며 3명을 선출.
◦ 공사원(公事員):원장(院長)과 재유사(齋有司)를 천망(薦望)하고 유생(儒生)을 취사(取士)하여 유안(儒案)을 올리는 추천인들이고 10명으로 구성되며 일종의 합의기구라 할 수 있음.
◦ 별유사(別有司):서원의 각종 문부(文簿)를 검열하고 서원의 예산을 편성한다. 3명으로 구성되며 임기는 3년이고 재임할 수 있음.
◦ 별고유사(別庫有司):책판의 출간과 다리와 배를 수리하는 일을 맡으며 2명 선출하고 임기는 2년.
◦ 수리소유사(修理所有司):서원의 건물이나 배수로 등의 수리를 담당한다. 2명 선출하고 임기는 2년.
◦ 단소유사(壇所有司):시사단각(試士壇閣)의 수리를 맡아보며 1명 선출.

이상에서 살펴본 유사의 임기는 기한이 만료되고 재임(再任)의 천(薦)이 없으면 그대로 체임이 되며 재임 여부는 당회(堂會)에서 결정한다. 원장(院長)의 천망은 후보자 셋 가운데 한 명을 추천하는 삼망제도(三望制度)로 하는데 이것은 옛 벼슬아치를 추천할 때와 시호(諡號)를 작성할 때 왕이 그 중 하나를 낙점하는 데서 연유되었다고 한다.

6. 院規, 鄕約
1) 주자백록동서원학규(朱子白鹿洞書院學規)
父子有親, 君臣有義, 夫婦有別, 長幼有序, 朋友有信. (右五敎之目)
아버지와 아들의 사이에는 친(親)함이 있어야 하고, 윗사람과 아랫사람 사이에는 정의(正義)가 있어야 하고, 지아비와 아내의 사이에는 분별이 있어야 하고, 어른과 어린이의 사이에는 순서가 있어야 하고, 벗과 벗의 사이에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위는 오교(五敎)의 조목(條目)이다.

博學之, 審問之, 愼思之, 明辨之, 篤行之. (右爲學之序)
널리 배워야 하며, 상세히 물어야 하며, 삼가 생각을 해야 하며, 밝게 분간을 해야 하며, 돈독하게 행해야 한다. 위는 학문을 하는 순서이다.

言忠信, 行篤敬, 懲忿窒慾, 遷善改過. (右修身之要)
말은 충성스럽고 믿음이 있어야 하며, 행실은 독실하고 공경하여야 하며, 분노는 참아야 하고 욕심은 막아야 하며, 착한 대로 옮겨가야 하고 허물은 고쳐야 한다. 위는 몸을 닦는 요결(要訣)이다.

正其義, 不謀其利, 明其道, 不計其功. (右處事之要)
그 의(義)는 바로 잡되 사리(私利)를 꾀하지 말아야 할 것이며, 그 도(道)는 밝히되 자기의 공로는 헤아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위는 일에 처하는 요결이다.

己所不欲, 勿施於人, 行有不得, 反求諸己. (右接物之要)
자기가 하고자 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미루지 말아야 할 것이며, 행해서 얻지 못할 때에는 돌이켜 자기에게 탐구(探求)하여야 한다. 위는 사물을 접하는 요결이다.

2) 이자향립약조(李子鄕立約條)
父母 不順者
부모(父母)에게 순종(順從)하지 않는 자(者).
兄弟 相鬩者
형제(兄弟)끼리 서로 때리며 싸움을 하는 자.
家道 悖亂者
가도(家道)가 광패(狂悖)하고 어지러운 자.
事涉官府 有關鄕風者
일이 관가(官家)에 저촉되거나, 시골 풍기(風紀)에 관련되는 자.
妄作威勢 擾官行私者
망령되게 위세(威勢)를 조작하여 관가를 시끄럽게 하고 사사로운 일을 감행하는자.
鄕長 陵辱者
향중(鄕中)의 덕망(德望) 있는 어른을 능욕(陵辱)하는 자.
守身孀婦 誘脅汚奸者
절개 지키는 청상과부(靑孀寡婦)를 꾀어 위협하고 간통(姦通)하는 자.
以上 極罰
이상(以上)은 극벌(極罰)이다.

親戚 不睦者
親戚(친척) 사이에 和睦(화목)하지 않은 자.
正妻 疏薄者
아내를 소박(疏薄)하는 자.
隣里 不和者
이웃 동네 사람들과 화목(和睦)하지 않는 자.
儕輩 相毆罵者
동년배(同年輩) 끼리 서로 구타(毆打)하고 꾸짖는 자.
不顧廉恥 汚壞士風者
염치(廉恥)를 돌보지 않고 선비의 풍절(風節)을 더럽히고 무너뜨리는 자.
恃强陵弱 侵奪起爭者
강(强)한 위세(威勢)를 믿고 약(弱)한 자를 업신여겨 침탈(侵奪)하고 다툼을 일으키는 자.
無賴結黨 多行狂悖者
무뢰배(無賴輩)가 서로 작당(作黨)하여 여러 차례 광패(狂悖)한 일 간행하는 자.
公私聚會 是非官政者
공사(公事)나 사사(私事)의 모임이 있을 때, 관가(官家) 정사(政事)의 옳고 그름을 논평(論評)하는 자.
造言構虛 陷人罪累者
헛된 말을 날조(捏造)하여 남을 죄과(罪過)에 빠뜨리는 자.
患難力及 坐視不救者
남이 환난(患難)을 만났을 때, 힘이 미칠 수 있어도 앉아 구경만 하고 구출(救出)하지 않는 자.
受官差任 憑公作弊者
관가(官家)의 임무(任務)를 맡았을 때, 공사(公事)를 빙자(憑藉)하여 민폐(民弊)를 만드는 자.
婚姻喪祭 無故過時者
혼인(婚姻)과 상례(喪禮)•제례(祭禮)를 아무런 까닭 없이 제때를 지키지 않는 자.
不有執綱 不從鄕令者
집강(執綱)을 업신여기며, 향령(鄕令)을 따르지 않는 자.
不服鄕論 反懷仇怨者
향중(鄕中)의 공론(公論)에 복종(服從)하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구원(仇怨)을 품는 자.
執綱徇私 冒入鄕參者
집강(執綱)을 맡았을 때, 사사로운 일을 위하여 멋대로 향참(鄕參)에 들어가는 자.
舊官餞亭 無故不參者
구관(舊官)을 전송(餞送)하는 자리에 아무런 까닭 없이 불참(不參)하는 자.
以上 中罰
이상(以上)은 중벌(中罰)
公會 晩到者
공사(公事)의 모임에 시간(時間) 늦게 이르는 자.
紊坐 失儀者
질서(秩序) 없이 앉아 예의(禮儀)를 잃는 자.
座中 喧爭者
앉은 자리에서 지꺼리고 다투는 자.
空坐 退便者
앉은 자리를 비우고 제 편의(便宜)를 보아 물러가는 자.
無故 先出者
아무런 까닭 없이 먼저 자리를 뜨는 자.
以上 下罰
이상(以上) 은 하벌(下罰)이다.

3) 남전여씨향약(藍田呂氏鄕約)
德業 相勸
덕업(德業)으로써 서로 권면(勸勉)하라.
過失 相規
과실(過失)이 있을 때에는 서로 경계하라.
禮俗 相交
예속(禮俗)으로써 서로 사귀어라.
患難 相救
환난(患難)이 있을 때에는 서로 구출(救出)하라.

7. 陶山書院儀節
總則
進道門出入○服人興不具禮服者不許出入服人入院則從西夾門出入

齋有司香謁行公句管區處院長公事員圈點薦望時身有功緦服則大門外易帶而入進
道門
典敎堂升降○尊賓與至卑者從西階升降凡員從東階升降
廟內周旋○凡入廟內升自東階循楹外入中門出自東夾門循楹內折旋楹外下東階
儒生謁廟○日入後不得擧行
光明室開閉○必三任具位或堂會時一二人不得若有不得己之事則有司禀于時原任句


取士
禮安七面面各一執薦收鄕中儒生名單合書爲八部執薦各取一部分坐各房門外布灰以禁人出入各點標後有司乃取一部進於上室次第以一執薦所點移點于一部而輒洗本草七旣畢以準點參榜七爲準四爲參書于遊院錄今改定
公事員十人開座典敎堂擇鄕中儒生年三十以上有文行者曺司書其名於竹筒輪於諸公事員諸員以標納之筒中旣畢封其口就院長前開視以準點參榜十爲準五爲參書于遊院錄取鄭寒岡先生道東取士法

三年一回爲正式而子午卯酉年正謁或享禮時人員十五或二十隨時加減
未入遊院錄者不敢膺院中諸任不得與院事五十以上不入遊院錄者或直書

有司
上有司一人任期一期正謁及春秋享日定爲三期或留任○統
軆院事
有故有言呈單辭任首席單子必具三單
齋有司二人任期一年○幹理庶事
單子同上首席有單子則一軆例單服單不在此例
句管都監三人任期三年或再任○院長區處財産統管
公事員十人任期三年或再任○掌上下任薦望圈點及取士時執薦等事
別有司三人任期三年或再任○檢閱文簿預算編成
別庫有司二人任期二年○掌冊板刊役印出及船橋造繕等事
修理所有司二人任期二年○掌院宇墻壁及臺社階砌溝渠修理事
壇所有司一人任期三年○掌試士壇閣修理事
以上諸有司公事員外無得兼任

薦望
上有司鄕道間尙德俱存者備三望執筆圈點三人名下後公事員或院儒各入圈點以三分
爲準而出望執筆以外一人不得再圈二人爲前望而瓜滿遞改時首席又薦新望一人圈


點出望如前
特望○曾經疏首者不用薦 直書望帖前任重複則亦不薦圈


停望援望○前望若遭重制則該名下不圈點待其說服與他同圈若有罪名則永永除名於
薦 但三年服者並不書名待服闋後復望

尤引望○前望俱有事故至空望則新薦三望無傳統之義故前任名啣書首望新薦二望備
三而前任不得圈點後次己有前望一人則不書前任新薦二望
首席辭單則句管入院還單或改出首席句管有故則前任一人入院
上有司薦望出望之際必相議於公事員及時齋席預爲內定若非預定而直呼輕薦則曺司
停筆享期臨迫首席有故則公事員薦出都執禮行事
齋有司遞代有司略收公議自薦出望今改正
公事員開座後時有司以榜錄中或道內行修廉謹有文者一人呼薦曺司卽書其名於竹筒輪於諸公事員諸員以表納筒畢開視三分二以上得可表者出望若不準點則公事員又薦一人再卜之又不得則三薦四薦而一人不可再薦呼薦時薦人履歷略告于座中○輪筒時滿座言不出口目無流聘
齋有司辭單則句管或前任還單或留單而帶服與未行公之前任不得還單單子連出三度
則更不可還單但小功以下服葬後還單
齋有司薦出之除無恢公私自檀便則停望或推望使不得施行有過失小則院長句管責之
大則院中會黜之
句管都監堂會時原任中衆所推服者薦望
公事員當會時齋任前啣中公正周遍者擇定
以上諸有司有重服則不可薦出公事員任期中遭重制則公事員開會補缺
公事員會期春享日齋有司缺員時○會員未及滿七人則不得開座若不備員而事有不 得己則時齋席臨時補參會期一不入則問之再不入則責之三不入則罰之
別有司堂會時齋任前啣中詳密有幹能者擇定
句管都監公事員別有司望帖只書年月日瓜滿後無再任之薦則自處以遞任再任堂中 口薦
別庫有司相議於公事員齋席前啣中選擇遞代修理所有司同上
壇所有司相議於公事員榜錄中選擇遞代
各有司有不遵院規則自堂會中聲討施罰

傳掌
上下有司院長齋任遞出後任時新舊有司咸入院中開座各時使及刀尺召立堂下各處所
藏物品一一親自檢査登錄於傳掌案而其中破壞者新備者無漏詳細記入錢穀用餘審
査記載而署名着啣
書冊別置一簿而光明室一二人不得開閉故只以目錄考閱署名着啣待曝晒或堂會時一
一考準
三任中雖一人出代必齊會院中謹愼傳掌在任中因事故呈單則新有司行公時入院傳掌
上下有司間當任未行公者無所受之案故不得署名必舊有司署名傳掌
別庫修理所壇所有司遞改時文簿一一整理傳掌或別有司對同參席

香謁
齋有司每月朔望前日入院朔望日早朝着儒巾衣道袍先詣盥洗位盥洗至中門前一人奉香一人奉爐齊入就位跪三上香俛伏興各奉爐香陳于床上降至拜席再拜更入廟內鞠躬審而出奉
院長在位則院長先入廟內齋有司奉爐香隨後齊入院長就位跪三上香奠于床上以次行

有司一人則奉爐廟直擧行
上下任行公必於此時因事故無時行公必行此禮

正謁
正月初五日行○四日三任及鄕中諸員入院五日早朝首席疑立堂上齋有與諸員北上東西相向司序立於庭行庭揖禮曺司進揖於齋有司齋有司口薦執禮曺司進執禮前相揖執禮口薦謁者曺司進謁者前相揖復位執禮入廟庭唱笏齋有司及諸員行亞階上入廟庭序立拜位以次行禮禮畢出典敎堂首席與年高者南上西向立執禮以下東上南北相向立行堂揖禮復入廟內奉審而出凡儒生入廟內陪首席行禮則儒巾道袍擧行堂上及執禮則否○謁者引首席時折旋升降處皆揖

笏記 云云
正謁榜外人許入參拜各時使差定各文簿勘斷亦日廳斷

享禮
春秋仲月中丁日行○若値國忌或因事故則退行
下丁無下丁則用亥日或用丙日
仲月朔日差祭有故則臨時進退○開座典敎堂獻官及祝執望報獻官四員祝執各一諸儒
出文差備獻官及祝執有故則呈單必於入齋日以前
上下有司前三日入齋獻官及祝執諸儒前二日入齋不出進道門禁喧譁時時習禮
獻官若不備員則上下有司入齋卽時更爲望報
正齋日早朝行謁廟禮○略與正謁時謁廟儀同而但曺司先詣執禮前相揖執禮口薦謁者
有笏記

笏記 云云

滌器○朝後有司入祭器庫昭數監滌
分定執事○午開座典敎堂凡開座則行相揖禮必分定獻官及執事 祝一人, 贊者一人, 謁者一人, 贊引二人, 司尊二人, 奉香一人, 奉爐一人, 奉爵一人, 奠爵二人
祝入廟內取祝版出堂中書祝文還奉于故處奉祝版則由中門出罷座後皆起立更坐有 司出堂中亢聲立讀約文因食堂開座擧食床坐揖擧匙
牲看品○午後有司具祭物入進道門獻官以下皆下階南上東西相向序立迎牲安置于庭中有司奉黍稻米入典祝廳置之床上還至庭中獻官以下更北上相向序立有司就牲前北向立鞠躬告曰充獻官就牲東西向立應曰腯有司又就牲西東向立告曰充獻官又就牲南北向立應曰腯有司又就牲北南向立告曰充獻官又就牲西東向立應曰腯復位行亞階上各歸處所
封尊○有司復入典祀廳檢量斗數封祭酒元位五斗從享位三斗
淅米○夕有司入典祀廳使時使等奉祭米出進道門一邊炬火一邊掃除道路趍至江邊乘 舟入中流九回精洗後駿奔走還奉故處○出入之際獻官以下皆下階序立鞠躬
陳設○有司持陳設圖入廟內依圖監整
行祀○夜正衣冠危坐待丑正刻獻官各具官服疑立堂中諸執事北上相向序立於庭行庭 揖禮如朝儀執禮先入唱笏折旋與就位在笏記圖式○受胙時執事祝擧行禮畢行堂揖
禮如朝儀行祀時設庭爎三處

笏記 云云

祭公事○早朝祝執並坐東齋南壁下諸執事以次東西相向坐自尊酌先詣祝執前曺司坐
執禮審叩行祀時失禮隨問隨答執禮曰退然後乃退以次至謁者畢祝執更席對坐相責
失禮相推不失禮而罷前者禮吏立於門外儒生有失禮者則抄報于官二定配其嚴如此
行飮福禮○因開座典敎堂以酌酌酒初獻官巡盃
先初獻官亞獻官巡盃先亞獻官終獻官巡盃先終獻官擧飮之時一座必先坐揖

堂會
院中有合同相議之事則依首席句管或前任分付定日發文若有鄕中前任喪逝則待其葬 後
院中有事而無前任分付則有司使首奴告目鄕中前任隨題音裁處
三任俱空無堂會發文之人則使壇所有司發文速壇會區處院事
光明室曝晒與重大事頃發文大堂會則勿論榜外榜內咸入敦事
空院中前任非區處之事則不可入院如有不得己之事則必召集公事員薦出首席空堂則 前任避院前路
齋有司香謁以外非公開周知之事則不可以些少所觀數數來往
凡員絶勿出入或有事或引賓必衣冠以守敬肅之儀

財政
齋有司春秋賭租合算後正謁享禮焚香費必先詣定封置一年流用與別有司對同預算後剩餘越修理所
院中財産齋有司全部管理然至於巨額不可單獨檀便每諮議於別有司處決
儒宮或文會相助之節外處儒生來往行資非一鄕公定之事則不可支出
土地小作移轉時與別有司相議定幾年限度成立
契約而不可數數移轉○睹貰二年巳上未納者不得己移轉此意通過別有司後出牌
不在任司之位則財政出納與土地移轉絶勿干涉
別庫修理所壇所有修理事則必諮議於別有司預算編成諸有司有處理錯誤之端則雖外人不必待堂會而先私言助無妨

文簿
長貳之任正謁享禮後正書任司案無事時一二人不可書入
享禮後獻官執事必移書于執事案
尋院錄使儒林祇謁者書姓名年月日及住所午饒或留宿
書冊目錄新入冊子一一記入
各處往復通文單子牌子等書類一一謄抄以備後日參攷
錢穀文簿明白整理而穀用錢用各置一部穀物流用賣却用殘及金錢收入支出詳細記載年月日下署名前穀未入者抄載于未捧記己載未捧記者作入後只載錢簿除減於未捧記
田沓案時作欄新定小作人卽時記入
契約書領收證等別綴一冊使後任爲考見之便
別有司每朔勘簿後別成一部輪告于句管
別庫修理所壇所有司各定文簿年終與別有司對同勘結

報酬
李主簿公墓祀時送金二十錢


上有司齋有司句管別有司歲儀正 斗作用物品隨時以次有等分
鄕中前任賻儀厚 一束燭一雙封皮書某(姓)院長某宅(平時宅號)護喪所入納陶山書
院賻儀
道內院長回資百里以內 以外 道內齋席回資百里以內 以外
齋有司履價一人當春正 斗秋正 斗別有司履價正別斗別庫有司正 斗歲儀 修理所有
可履價 斗歲儀 壇所有司履價 斗歲儀

附下隸
廟直一人廟門開閉廟內掃除廟庭除草享禮祭物巖栖軒光明室開閉首席呈望首席單
子輪示前任傳喝等事擧行有罪非首席原任則無得汰去首席在座則齋席堂員在齋房
無得擧聲誚責
庫直一人庫門開閉錢穀出納田沓關係事擧行
都使令一人齋席呈望齋席單子及通文其他文字輪示等事擧行庫直都使令有罪時齋席
在座前堂員言及于齋席然後擧聲誚責
齋直一人堂室掃灑巖栖軒除草等事擧行
山直一人四山守直廟直例兼
食母三人治廚事飮食
刀尺三人治居齋生衣服食母兼
印工一人掌藏版閣開閉書冊及遺墨印出事
船工二人渡船及橋梁造成
負木二人大廳一降廳一
各所庫子各一人各治其庫之事己經廟直者曰前首奴己經庫直者曰入首奴堂會及凡有
大事皆入擧行○各邑差奴今廢
給料
廟直私田 斗落月料 斗春四朔栗 斗夏四朔麥 斗冬四朔栗 斗衣資 春秋 月草饌價
每朔
庫直私田 斗落月料通一年正 斗
都使令私田 斗落月料 斗春四朔栗 斗夏四朔麥 斗冬四朔栗 斗
月草饌價每朔
齋直月料每朔 斗巖栖軒除草料栗一斗
刀尺私田各 斗落菜麻田各 升落沉菜料栗各斗
山直私田 斗落
船工私田各 斗落
各所庫直次各 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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